정신의학과 진료일지
예약 날짜를 빨리 잡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간 J님께 답장메일을 받은 일, M한테 손목을 들킨 일 등등 요 며칠새 원장님께 말해드릴 게 많다.
원장님과 죽이 척척 맞아 의사소통이 100% 잘 되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래도 차분히 잘 들어주시고 이야기해 주셔서 긴장되지 않은 마음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오늘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진료 기억이 뒤죽박죽이긴 하다.
원장님은 내가 너무 무겁지 않은 일을 무겁게 생각하며 죄책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앞으로 나은 사람이 되어 살아나가면 잠깐의 방황기 정도로 치부할 수 있다고.
또, 내가 나열한 나의 잘못들을 듣고 의아해했다. 그것과 내가 이렇게 힘든 것에 연결고리가 부족하다고 했다. 뭔가 더 있는 건지 물어보셨는데
나는 나를 잘 몰라서, 또 나의 속을 이야기하는 데 익숙지 않아서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 몰랐다.
원장님 말씀대로 되면 참 좋겠다. 나에겐 위의 문장처럼 되기엔 문제가 많다.
나는 나를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의 잘못들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다.
‘앞으로 나은 사람이 되어 살아나가자!’라는 결심을 하기엔.. 나에겐 하루조차 너무 길고 내일을 생각하는 건 심지어 벅차다.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이렇게 고통이라니.
원장님은 내가 M에게 한 말 “조금이라도 힘들어지면 나를 팽해.”라는 말을 들으시며 그건 M이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라고 했다.
나는… 나는 나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는 게 싫다. 원장님은 현재는 내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데 집중해야지. 다른 걸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나아지는 건가요.?’
원장님은 본인의 사례를 말씀해 주시며 본인의 실수를 축소해서 타인에게 말씀하신 일, 누군가는 아직 모르는 일 등을 말씀해 주셨다. 그것이 원장님께는 죄책감이라고. 그럼에도 죄책감에 눌리는 것보다 현재를 잘 보내는 게 책임을 지는 일이라고 하셨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원장님은 그렇게 정신승리를 하신다고 하셨다.
원장님이 부러웠다. 원장님은 그것을 잠시 담아 넣어둘 마음의 방이 있는 게 부러웠다.
”마음에 방이 많으시네요 “라고 말씀드렸다.
내 마음은 이미 먹칠이 되어 먹이 줄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방 따위는 없다. 얽히고설켜서 먹칠이 되어 있다. 그 형상이 생생하게 내 눈앞에 있다.
어쨌든 원장님 말씀은 나도, 그렇게 정신승리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신데. 나는 정신승리를 할 그 정신. ”정신“을 컨트롤 할 힘이 없다. 나는 어쩌다 이리 에너지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진료를 곱씹다 보니 원장님이 특이한 걸 물어보셨는데, ”학창 시절이나 20대 초반에도 우울함이 항상 있었냐 “는 물음이었다.
어떤 사건이 없었더라도 우울한 시기가 있었냐 하고 물어보셨다.
흠.. 20대 초반은 확실히 즐거웠다. 학창 시절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오히려 우울함이라는 감정을 느낀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라고 했다. 친구들이 사이코패스라고 놀릴 정도였다고.
선생님은 그때는 감정이 잘 컨트롤되었냐 물었는데.. 나는 감정 컨트롤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아닌가?.?
무튼 그래서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늘 새로 알게 된 점. 선생님은 중독 전문의시라고 한다. 정말 나쁜 사람을 많이 보았다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나의 죄책감들이, 부끄러움들이 가벼이 느껴지시는 걸까.
선생님이 중독 전문의라고 하시자마자 나는 여쭤봤다.
”저는 그럼 무슨 중독일까요? “
선생님은 당황하시며, 중독이라고 부를만한 건 없다고 하셨다. 통쾌한 답은 아니었다.
아침약 용량이 늘었다. 무슨 의미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