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과 진료일지
교수님을 뵌 지 몇 번 째더라 세 번째인 것 같다. 그전에 다른 병원에서 두 번의 진료를 받았으니, 벌써 비가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믿을 수가 없다. 요즘 내 하루는 너무 길기 때문이다. 아침은 너무 일찍 시작되고, 밤은 너무 늦게 끝나 그 사이의 시간이 나는 억겁처럼 느껴진다.
지난 진료 때 교수님을 돌팔이라고 칭한 것을 취소하기로 했다. 이번 진료는 차분한 진료였다. 나도 차분히 내 마음과 상태 등을 잘 이야기할 수 있었고(사실 진료에 꼭 필요하다 생각되는 이슈들을 메모장에 짧게 적어갔다_ 참고로, 이야기 전 메모장에 할 말을 미리 적는 짓은 살면서 처음이다), 저번 진료처럼 질질 짜지도 않았다. 교수님의 말씀도 귀에 들어왔던 것 같다. 근데, 교수님 말씀이 귀로 들어오는 거지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그게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도. 교수님은 저속모드로 살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교수님이 추천해 주시는 “저속모드”의 행동이 나에겐 방전된 배터리를 억지로 켜내서 비상 배터리로 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한 편으로는, 선생님은 나의 인생을 살아가주지 않을 거라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도 생각한다. ‘지금 저속모드로 지내면 제1년은요?’라고 묻고 싶은 것은 그저 목구멍 속에 처박아뒀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하는 나의 걱정은 그들의 몫이란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자꾸만 그게 내 뒤에서 기어 올라와 업히는 것이다. 내 뒤에 업힌 놈이 죽든 말든 떼내어 바닥에 팽개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 무게는 무거워진다.
지난 진료 후에 내 마스크가 눈물로 젖어 나온 게 창피해서 휴지며 새 마스크며 바리바리 가방에 챙겨 왔다. 병원에서 대기를 하는데, 옆에 계신 분이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폰을 뚫고 들어왔다. 계속 못 본 체하는 게 맞나. 휴지를 건네는 게 혹 부담일까. 생각하다 그냥 휴지를 꺼내 건넸다. 그냥 나는 그런 사람이다. 행동이 지나치게 먼저인. 지난주의 나처럼 휴지가 없어 곤란하신 건 아닌가 하는 작은 염려 때문이었는데, 휴지가 있다며 한사코 거절하시며 감사하다고 하셨다. 내가 괜히 부담스럽게 했나 싶어 고개를 푹 처박고 있었는데, 마침 내 차례가 와서 다행이었다.
이 글을 읽으며 나를 인정 많은 혹은 배려 많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덧붙이자면 나는 절대 그런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이기적이고 겉과 속이 다르며 솔직함을 핑계로 갖은 불건전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교수님과의 진료는 나의 일주일을 다 털어놓기엔 너무 짧기에, 교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솔직한 진료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저번 진료 때 추가해 주셨던 약을 검색해 봤더니 살이 찐다고 해서 사실 그 약은 빼고 먹었다고 털어놨다. 아침 약이 늘었고 밤 약도 교체되었다. 아침 약에 핑크색 약이 추가되었는데, ‘이거 데이먼스 이어 노래 중 pink pill과 같은 걸까?’ 싶어 조금 반갑기도 하다. 아침, 밤 약 말고 나의 자해행위를 멈추기 위한 필요시약이 추가되었다. 항상 지니고 있다가 먹으라고 하셨는데, 언제 먹어야 할까. 손목을 긋고 싶을 때? 전혀 필요치 않은 걸 잔고를 털어 사고 싶을 때? 미친 듯이 섹스가 하고 싶을 때? 모르겠다. 정신병자한테는 명확한 답만 주세요….
내가 항상 진료를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고 하니, 월요일에 진료를 잡아주셨다. 원래 진료는 수요일인데, 월요일로 바꾼다고 큰 의미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다음 진료까지는 조금만 버티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