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과 진료일지
새로운 카테고리로 이야기를 처음 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보라 하니, 막상 뭘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지혜로운 엄마와 재미있는 아빠 사이에서 돈은 좀 없었을지 몰라도 사랑은 넘쳐나 돈의 부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시절 돈의 부재는 엄마와 아빠의 말에 묻어 나오는 우리에 대한 죄책감으로 짐작해 볼 뿐이다.
떠오르는 어릴 때 에피소드라곤 엄마랑 돈가스를 같이 만들어먹거나(특식이었다),
베란다에 햇빛이 내리쬘 때 작은 원목책상을 꺼내 엄마가 예쁜 그릇에 담아준 화채를 단 둘이 먹거나 대화했던 일.
아빠 친구네 가족과 함께 계곡에 가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초록 바다' 동요를 다 같이 부르던 일.
동생이랑 엄마 화장품과 옷, 구두로 치장했던 일.
발레 학원을 아빠가 "빨래 학원"이라고 부르며 놀렸던 일.
초등학생 땐 막내가 갓난아기라서 기대를 않고 있었는데 비 오는 날 엄마가 우산을 들고 학교에 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일.
이모들이 내 첫 운동회에 와준 일.
엄마가 내가 다니던 어린이집 친구 엄마들이랑 '흥부와 놀부' 연극을 만들어 우리 앞에서 해 준일.
적다 보니 참 많다. 의사 선생님 앞에서 말할 때는 기억이 안 났는데..
고등학생 때 롤모델로 엄마아빠를 적어냈을 만큼 나에겐 대단하고 멋진 사람들이다.
엄마와 기질적으로 아주 다르단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선생님은 나와 엄마의 기질차이로 인해 내가 어린 시절 받았을 영향에 대해 꼬집으셨다.
그것은 마치.. 나의 기반이던 세계를 흔드는 일이었다. 항상 엄마가 옳고 현명하며 定道라고 여긴 나는, 내가 오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엄마는 너무 마음이 넓어서 질책하는 일 따윈 거의 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엄마 눈에 거슬리는 일이 많았으리. 그건 내가 첫째라서 더 그런 것도 있다.
나는 엄마가 자녀 교육(국어, 수학 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국민으로 성장시키기 위함_엄마말에 따르면)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힘쓰고 배웠는지 알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안 좋은 영향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엄마가 안쓰러워서.
나는 엄마만큼 도덕적이고 성실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사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선생님이 자꾸 "그건 좋지 않네요"라며 덧붙이실 땐 더 이상 엄마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엄마에게 받은 상처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근데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일 거다. 나의 화법과 행동에 나보다 더 상처받았으리라.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부터 우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꺼내어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한편으론 신기해하며 지내왔다.
아빠와 엄마가 끌렸듯, 나는 아빠와 똑같기에 엄마와 서로 끌리는 지점도 분명 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앉아 있길래 선생님이 이 이야기를 하자고 하시는지 궁금하다.
앞에 늘어놓았듯 좋은 기억밖에 떠오르질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