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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다 5

25년 3월 27일

by 해마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끼고 나오니 참 편하다. 마스크가 당연하도록, 미세먼지가 안 좋은 나날들이 계속되면 좋을 것 같다.


처음으로 술집에서 혼술을 했다. 이유는 별 거 없다. 집에 들어가기 싫은 데 갈 곳이 없어서. 초반에는 아무도 말을 안 걸어서 참 좋았는데. 옆자리 앉은 철수가 힘드냐며 힘듦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는 걸 듣고 있자니(사실 듣진 않았다) 괜히 왔다 싶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또 다른 철수가 추근덕댈 때는 '다신 안 와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어느 한 곳도 편한 장소가 없다.


사람 일 모른다. 는 말은 딱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정신승리계의 권위자 급으로 불리곤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에너제틱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추상적인 생각을 많이 하기는 해도,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단단한 사람이라는 명찰이 달려있었다. 평생 쓸 에너지를 다 소진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지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까마득한 느낌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기엔 고개를 가눌 힘이 없다. 어쩌면 나의 고통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고통이 세포처럼 내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같다. 핀볼게임을 하듯 온몸을 흔들어가며 애써 이리저리 보냈는데, 그게 진득하게 눌러붙어 형태를 띠니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제는 손톱으로 살을 긁어봤다. 안 아팠다. 똑같은 곳을 몇 번 긁으니 느낌이 왔는데, 그러다 관뒀다.

어제는 밥을 먹다가 갑자기 책상 위에 꽂혀있는 가위가 눈에 띄는 거다. 밥을 뜨다 말고 뭉툭한 끝으로 살을 그어봤다. 그것도 딱히 안 아팠다. 나는 쫄보고, 흉이 지면 누가 알게 되니까 가위를 펼쳐 차가운 단면을 볼 용기는 없다. 그러고 있을 때나, 그걸 글로 쓰고 있는 지금이나 관종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럽다.


제목을 참으로 잘 지은 것 같다. 글을 쓸 때마다 '가라앉다'는 말 이상으로 이 글을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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