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3월 24일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을 찾아내 죽이고 싶다.
나는 수면 속으로 가라앉는 중인데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게 싫다. 시간이 흐른다기보다 날 향해 돌진하는 것 같다. 양손 가득 숙제들을 들고.
그걸 보고 듣고 느끼는 건 버겁다.
미치도록 집에 혼자 있고 싶었었다. 드디어 그런 순간이 왔는데, 미치도록 싫었다. 당최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요즘 먹는 약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효과가 확실하다. 눈물이 너무 나서 짜증이 나기도 했는데,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조금은 편해졌다. 영희와 대화하며 밥을 먹을 수 있는 정도로.
주말에는 철수를 만났다. 철수는 아기동물 같다. 자꾸 관찰하게 만든다. 그 작은 행동들의 이유가 궁금해진다. 철수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내가 철수에게 궁금한 게 없어지는 날은 우리가 헤어지는 날 일거라고 했다. 철수는 궁금하다고 다 물어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따뜻한 사람.
철수에게도 내가 왜 좋냐고 물어봤다. 철수는 "예쁘고 재밌어서."라고 답했다. 진부한 답변이지만, 그의 심플한 답이 고마웠다.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거창한 성격 따위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철수가 가는 게 너무 싫었다. 헤어지는 게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그 마음을 참지 못해 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더 말하면 걱정할 것 같아 네 번째 즈음 멈췄다.
아침엔 개어둔 빨래를 넣어주러 영희 방에 갔다가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라는 책이 꽂혀있는 걸 봤다. '괜찮아서'가 아니고 '괜찮아 보여서'라니 저자는 이딴 걸 위로라고 하는 말인지 의문이다. 영희도 힘든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든 걸까.
집에 혼자 들어가기 싫은 마음과 영희를 요즘 살피지 못했다는 마음. 이기와 이타 그 사이에서 영희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집에 함께 들어와서 영희는 컵라면을, 나는 와인을 마셨다. 영희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떠들면서도 어떻게 뭉근하게 물어볼까 고민하다, 영희 친구 이야기 뒤에 질문했다.
"너는?"
"나 뭐?"
"힘든 건 없어?"
"매일 똑같은데 힘들게 뭐 있어"
괜찮다는 걸까. 힘들다는 걸까. 그래도 영희는 3월이 되어 개학하는 기분으로 새로운 다짐들을 하고 실천에 옮기는 중이라고 재잘거렸다. 다행이다. 우리 영희가 이런 늪에 갇히게 된다면 그건 내가 힘든 것보다 더 힘들 것 같다.
나의 무게가 주변의 지반까지 누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람이 있다면 딱 나의 존재만큼만 싱크홀이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