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3월 29일
그러니까, 시작은 까만 티셔츠였다. 새로 산 그 티셔츠를 입었던 날 옷을 벗었더니 몸이 온통 흙빛이 되어있었다. ‘아씨, 한 번 빨고 입을 걸‘이라고 생각하며 당장 티셔츠를 대야에 넣고 빨기 시작했다.
대야에는 먹물 같은 물이 고였다가, 심해가 고였다가, 계곡이 고였다. 맑아졌나 싶어 다시 비누칠을 하면 먹물이 다시 울컥 나왔다. 이걸 여러 번 반복하고 있자니 전완근이 아파와서 짜증 나는 마음을 담아 발로 밟기 시작했다. 한참을 밟고, 물을 버리고, 다시 밟아도 까만 티셔츠는 여전히 어둠을 뱉었다. 좀 더 간절한 마음이 들어, 열심히 밟았다. 밟을수록 대야 속 세상은 짙어질 뿐이었다. 아, 한 번 검은색으로 물들고 나면 깨끗해지기 위해 몇십 번을 짓밟아도 어둠이 배여 나오는구나. 까만 티셔츠에서 괜스레 절망을 느꼈다.
이번 주에 유독 생각나던 영희를 우연한 기회로 만났다. 만나고 싶지만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생각이나 기분을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결정할 수도 없거니와 영희 앞에서 무너지는 건 더더욱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 영희가 생각났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릴 적 영희와의 추억을 고향처럼 느낀다. 마음속 고향을 찾고 싶어 영희가 생각났던 걸까. 영희를 만나기 전 약을 두 봉지나 먹었다. 혹여 실수를 할까 봐.
집에 있기도, 공부를 하기도 싫어, 책을 몇 권 들고 2호선에 올랐다.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데, 나 혼자 덩그러니 외선순환을 한 바퀴 돌았다. 1년이 흘렀다. 나는 이 짓을 7년 했다. 현실을 자각하니 입이 썼다. 내 앞에 선 머리가 희끗하신 철수께 자리를 양보해 드렸다. 1년을 도는 동안에도 나는 괜찮은 인간으로 보이고자 하는 위선을 붙잡고 있었다.
요즘은 목적어를 모른 체 “놓고 싶다”는 생각만 한다. 나는 위선 말고도 무엇을 그리 잡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