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음 Jun 08. 2023

남편의 에너지

남편을 이해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

남편은 퇴근해서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울 때가 많다. 몇 번 들락날락할 때가 있지만 대부분 너무 일찍 침대와 한 몸이 되어버린다. ‘너무 일찍’이라는 표현이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족들 중 가장 먼저 꿈나라로 빠져드는 사람이 남편

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에게 퇴근 및 귀가는 ‘가정’이라는 제2의 직장으로 다시 출근하는 일과 같았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집 정리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저녁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으니까. 또한 두 아들과 놀아주거나 공부를 봐주는 등의 엄마 역할을 하기에 저녁 시간의 대부분을 써버렸으니까. 이런 나와는 달리 남편은 침대 위에서 매우 오래 머물렀기에,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매우 화가 났다. 이어폰을 끼고 방송 프로그램을 보거나 게임을 하느라 내 말을 못 듣고 무반응일 때는 얄밉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집안일이나 육아를 하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편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누워 무언가를 하다가 어김없이 스르르 잠들어버리는 것을 여러 날 보며 점점 그를 ‘무지 게으른 사람’으로 치부하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섣부른 판단은 내 안의 불만으로 자라났고 지인들에게 전하는 하소연 내지는 험담으로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내 판단이 남편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오해였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일요일에는 출근 전날이니 집에서 쉬어야지!’ 내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니까(일찍이라 함은 6시정도이다) 9시 반에는 자야 한다’는 단골 레퍼토리를 읊어대는 것이 결정적인 힌트였다. ‘스트리트파이트’라는 게임을 해 본 사람은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생명체에는 누구에게나 제 나름의 할당된 에너지가 있다. 이 에너지는 여러 이유로 점차 소진되는데 게임 화면상에서는 친절하게도 이것이 소진될 때마다 레벨 표시 막대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다 모두 고갈되어 버리면 그것의 주인공은 픽 쓰러져 더 이상 힘을 쓰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남편은 늘상 전투를 크게 치르고 온 전사처럼 바깥에서 에너지를 거의 다 써버리고 들어왔다. 다행히도 게임 속 캐릭터처럼 단번에 넉다운 돼버리지는 않았지만 아주 조금의 잔존 에너지를 사용해 침대 이불 속으로 간신히 스멀스멀 기어들어간다.


이렇듯 가족들에게 누워있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주는 남편. 반면 더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의 나. 남편과 나의 차이에 대한 원인을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곰곰히 생각해본다. 일단 남편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원체 부족한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초저녁부터 너무 일찍 에너지가 떨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직장에서의 노동의 강도가 세거나 유독 피곤한 일이 많았겠지’라고 모든 아량을 끌어내 봐주려고해도 도무지 이해해주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남편은 나와 같은 직종에서 일하고 있고 우리는 거의 같은 강도의 엇비슷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경우라면 아이템을 구입해서라도 에너지의 총량을 늘리면 좋을텐데 남편의 경우는 어찌 해야 할까?


가전제품을 보면 ‘에너지 소비 효율 등급’이 표시되어 있다. 1부터 5까지 등급에 따라 에너지 소비 효율을 구분해 놓은 것인데, 야무진 소비자들이 제품 구매시 꼼꼼히 체크해보는 것 중 하나이다. 나 역시 최근에 냉장고를 구입할 때 에너지 소비 효율 등급 1등급 제품을 골랐다. 그런데 정작 가전보다 더 중요한 남편을 고를 때는 이 부분은 생각지도, 확인해 볼 수도 없었으니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도 가전제품처럼 에너지의 총량이나 소비 효율등급이 한눈에 보일 수 있게 이마에 떡하고 표시되어 있다면 어떨까? 그러면 기껏해야 에너지 소비 효율 등급이 4나 5 정도 밖에 되지 않을 남편을 놓고 결혼을 망설였을까 매우 궁금해진다.


남편은 오늘도 퇴근해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요즘은 남편의 에너지에 대해 이해도가 높아져서인지 예전보다 확실히 화는 덜 난다. “자기 에너지가 달리나봐.” 라고 차분히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운동을 하면 덜 피곤하고 기초대사량이 늘 것 같아. 아니면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관리해서 퇴근할 때 에너지를 더 비축해서 오면 좋을텐데... 올라오는 잔소리와 짜증을 살포시 누르고 넌지시 여러 가지로 조언을 해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