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음 Jul 06. 2023

엄마의 딸, 아들의 엄마

부모 자식 간 사랑의 온도 차이

 학부모 공개수업 날 아침이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재잘재잘 떠드는 꼬마들 대화가 경쾌하다.

‘난 엄마가 오는데, 넌?’, ‘나도’, ‘난 아빠가 와’ 대화가 멈춰지는가 싶더니 그중 하나가 나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선생님도 엄마 와요?’ 아이의 순수함이 귀여워 곧바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공개수업 내내 교실 속 공기는 오고가는 관심과 주고받는 사랑의 눈길로 핑크빛이다. 아이들 두볼에 물드는 홍조와 부모님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따뜻하다. 양쪽의 크기나 온도가 엇비슷해서 어느 한 편으로도 기울어짐이 없다. ‘엄마와 나’의 관계도, ‘나와 아들들’의 관계도 예전에는 이처럼 보기 좋게 균형 잡혀 있었겠지?



     

 작년 가을, <H마트에서 울다>라는 책을 읽었다. 인디 밴드의 보컬이자 한국계 미국인 미셸 자우너의 에세이이다. 솔직히 말해 그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공감할 만한 부분이 매우 많았다. 한국인인 그녀의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고 한다. 또한 20대의 딸을 남겨두고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 두 가지가 나와 상당히 닮아있어서 읽는 내내 엄마를 추억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가 무척 그리웠고 친정엄마를 잃은 나 자신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살아 계시다면’ 으로 시작하는 해피엔딩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수없이 많이 쓰고 지웠다. 엄마에 대한 내 감정은 딱 이 정도였던 것 같다. 최근에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말이다.     




 최근 들어 가족들의 무심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남편이야 뭐 워낙 익숙해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아들들마저 갈수록 친구들, 운동, 게임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엄마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디가 아픈지, 누구를 만났는지...... 엄마의 일상과 마음 상태는 그들의 안중에 없다. 오히려 그날 저녁 메뉴나 자신들이 갖고 싶은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아들들의 무관심이 가족들을 향한 야속함으로 바뀔 즈음이었던 것 같다. 문득 딸로서의 나의 모습을 찬찬히 되돌아보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엄마가 소녀 시절에 어떤 꿈을 꾸었는지, 아빠의 어떤 모습에 끌려 결혼하게 됐는지, 육아하는 동안 힘들지는 않았는지...... 이런 것들을 한 번이라도 궁금해한 적이 있었던가? 엄마의 취향, 성격, 식성을 꿰뚫고 있던 미셸 자우너와는 반대로 나는 엄마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내 마음은 엄마를 향한 후회의 먹구름으로 얼룩진 채 한동안 어두컴컴했다.      




 글쓰기 강좌를 다녀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BMW 접촉 사고에 대한 글을 썼는데 엄마 글 중 베스트래’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아들 탓을 한 이 단락이 특히 찌질해서 좋다고 하셨어,’ 아들의 관심을 기대하며 말을 덧붙였다. ‘읽어볼래?’ 넌지시 말을 건네며 슬며시 글을 아들 옆에 내려놓았다. 출근 준비를 분주히 하면서도,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는 아들을 흘끗거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내 글에는 눈길 한번 안 주는 것에 살짝 빈정이 상했나 보다. 글이 인쇄된 종이 뭉치를 낚아챈 뒤 이번에는 둘째 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형아는 관심이 없네. 네가 읽어 볼래?’ 라고 말을 끝내자마자 큰 아이의 시크한 대답을 들었다. ‘내 욕하는 그 부분은 읽었어요’ 둘째는 얼른 종이를 받아들어 진지하게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역시 눈치 빠른 녀석! 흐믓한 미소를 던지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 ‘엄마, 이따 마저 읽으면 안돼요?’ 오마이갓!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다지 많이 속상하지는 않았다. 예전의 나 역시 엄마에게 비슷하게 대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출근과 등교를 위해 큰아들과 함께 차로 이동을 하며 대화를 마저 이어갔다. 농담 반 진담 반의 마음으로 미끼를 던지고 반응을 살폈다. ‘갑자기 네 서평 수행평가를 봐주기 싫어졌어’, ‘아~ 왜요?’ 역시 아까보다는 즉각적인 반응이다. ‘넌 엄마의 글도 안 읽어 주면서 엄마는 네 글쓰기를 도와줘야 해?’ 나는 가끔 소심하거나 옹졸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협박 섞인 투덜거림 내지는 소심한 복수를 하는 사이 이미 아들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출발할 때부터 작아지기 시작했던 서운함은 대부분 녹아 버린 상태였다. 사랑과 관심의 추가 내 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져 있어도 괜찮다. 원래 사춘기 자녀들(특히 아들들)은 엄마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법이니까. 옛 어른들 말씀처럼 내리사랑은 진리일 테니까. 차에서 내리는 아들에게 손을 흔들며 내가 더 많이 사랑하고 표현하기로 가만히 다짐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편의 에너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