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이 전부는 아니니까
너그러움을 가져야 하는 까닭
복직을 한 지 2주 정도가 흘렀다.
티키타카가 좀 되는 반이 3개 반으로 늘었고,
다섯 개 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가쁘게 쉬던 숨도
이젠 거뜬해졌다.
나에게 인사를 하는 학생들이 늘고,
"안녕?" 하는 나의 대답도 자연스러워졌다.
아이들은 작은 것에 울고 웃는다.
청소년기 아이들일지라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그 순수함을 보고 있으면 귀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아이들이 얼마나 순수하냐면
다른 선생님에 대한 불만을 또 다른 선생님한테 털어놓는다는 점이다.
오늘도 티키타카가 백번쯤 오고 간 어떤 반에서 반공개적(우리끼리만 이야기하자는 암묵적 합의이나 대화구성원은 이미 30명인 경우)인
다른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나에게 터져 나왔다.
내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거라는 기대와
선생님에게서 느끼고픈 소속감을
이런 방식으로 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과의 관계형성이 제법 된 것이기에 기쁜 마음도 든다.
하지만 여기에서 맞장구를 치는 것은 안될 일.
나는 오구오구 하는 표정으로
"그랬구나아아~"라고 대답했지만,
바로 이어서 그 선생님과의 따뜻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들의 반응을 잠깐 보고는
"그래도 너희한테 그러신 건 살짝 너무하시긴 했다. 원래 정말 좋은 분인데!"
라고 곁들였다.
아이들은 금세 태세를 바꿔,
"맞아요. 정말 저희를 위해 주실 때도 있어요."
하는데,
그 눈빛이
이제 선생님 마음을 다 알았다는 눈빛이다.
그럼 또 그것이 얼마나 순수하고 예쁜지 모른다.
실제로는 그 선생님과의 에피소드 몇 가지 중
나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아주 아주 입체적인 사람이었는데,
사람의 가장 밝은 면과 가장 어두운 면,
가장 품격 있는 모습과 가장 본능에 가까운 모습 모두를 보여주었다.
사회생활 중 이렇게 극명한 입체적 인물은
그가 처음이었고,
아이들에게 보여준 면은 밝고 품격 있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는 아이들만을 위하는 참교사였다가,
언제는 한 아이에 대한 욕을 두 시간이 넘게 하는 다혈질이 되기도 했고
언제는 아픈 후배교사를 위로하는 따뜻한 선배교사였다가
언제는 아픈 후배교사에게 일을 떠넘기는 얌체가 되기도 했다.
언제는 모든 학년의 커리큘럼을 다 알고 모든 교수법을 통달한 능력자였다가
언제는 다른 선생님에게 수업자료를 달라고 부탁하는 게으름뱅이가 되기도 했다.
동료들은 그의 이러한 특성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본인이 그러한지 자각하지 못했다.
겉모습으로는 참교사이자 따뜻함이 흘러넘치는 선배교사이자 능력자였다.
모두가 아는 그의 다른 모습은 아무도 그에게 알려줄 수가 없는 것이었고,
순수한 아이들조차 그에게는 말을 못 한 채
나에게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나를 대입한다.
겉모습이 전부가 아닌, 나의 추하고 어두운 면도 있음을 그를 보며 생각한다.
주변인들이 나에게 알려줄 수 없는 무언가가 있겠지.
남들이 다 좋아하는 저 사람에게도 그런 무언가가 있겠지.
남들이 다 싫어하는 저 사람에게도 멋지고 빛나는 무언가가 있겠지.
그리고 그 다면성을,
인간의 불완전성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두가 불완전하므로
모두를 안고 갈,
너그러움을 가져야 하는 거라고.
나도 그럴 수 있으니까.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