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교시, 2교시, 3교시 연강에
급식지도까지 있어 정신이 없었다.
4교시에 급하게 도시락을 먹고 1시간을 서서 전 학년 급식지도를 하고 나니, 파김치가 됐다.
몸에선 그날 급식메뉴 냄새가 섞여서 배어있다.
이상한 향기를 달고 복도를 걸어 교무실에 다다랐다.
철수가 반가운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철수는 복직을 하며 처음 만난 학생으로
나를 따라다니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어제 자기가 구운 과자를 드셔보라며
정성스레 포장된 과자를 내미는 아이의 손이 귀여워서,
피곤했던 어깨가 갑자기 시원해졌다.
몸에서 나던 음식 냄새들이
고소한 과자 냄새로 바뀌는 것 같았다.
철수는 알까,
나의 건조했던
반나절의 학교 생활에 물을 주었다는 걸.
철수 덕분에 다정한 오후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기나긴 교육과정협의회는 나를 다시 지치게 했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비겁함이
가벼운 말인 듯 농담인 듯
뼈를 품고 내 귀에 와서 박힌다.
여러 사람들 중 말의 폭격기를 달고 있는
삼인방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자기 교과의 상황을 대변했지만 감당이 되지 않는 얼굴이다.
나 또한
갑작스러운 말의 폭격을 방어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 철수처럼,
다정하고, 귀엽게 말하면 좋을 텐데.
그렇게 말해도 학교 사정을
다 이해할 수 있는데.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듯,
폭격을 내뱉던 사람들은,
나의 소극적 방어에,
다른 교과로 옮겨가
똑같은 말을 폭격을 가한다.
고교학점제와 자율시간 운영으로
고등학교와 중학교 모두
교육과정 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양한 수업 선택권을 학생에게 주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을 테지만,
교실도, 교사도 한정적인 상황에서
딜레마에 빠진 교사들은,
'나만 아니면 돼.' 마인드를 또 발동시켰다.
(근본 원인은 역시 탁상행정인가...)
말의 폭격기 3인방의 말도
그런 베이스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전혀 진전되지 않는 회의에 속도를 내기 위한 고육책이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학교에 있으면서
잘,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다.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보면
토론의 과정에서 다수 측과 소수 측이 존재할 때,
다수라는 이유로만 소수의 의견을 묵살할 수 없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을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로 명명하고 있는데,
수의 우위를 차지하더라도
천천히
소수에게
논리적 근거로 설명하는 대화가
'존중'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의견이 '많. 으. 니. 까.'가
어떤 결정의 이유여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그간,
다수라는 이유로,
보편적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의사결정을 했던가.
말의 폭격기 3인방과 나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소수에 속한 사람들의 소외감을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
숫자는 떼어놓고,
천천히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문화가 간절히 필요하다.
나는 오늘도 수업시간에 이야기한다.
"국어 시간 제1원칙! 친구의 물음에 무조건 '친절함'을 장착하기! 그것이 국어 시간 우리의 설정값이다!"
아직 논리적 근거를 내세우기 부족한 친구들이 많아,
일단 '친절하기'부터 말해본다.
차분함과 친절함 속에 논리적 말하기도 가능할 테니까.
숫자가 전부가 아닌, 대화가
이곳, 교실에서부터 시작되길 바란다.
따뜻한 말로 물을 주는 철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