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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Sep 03. 2024

몇 마디 말이 전부는 아니니까

진정한 사과의 조건

얼마 전 남편과 사소한 말다툼을 하게 됐다.

원인은 아이 교육이나 집안일에 나만 동동거리며 바쁘게 사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서운한 감정이 몰려오다

과거에 쌓였던 일까지 이야기가 흘러갔다.


천주교 집안이었던 시댁, 남편은

결혼 전,

무교였던 내가 세례를 받길 은근히 원했다.

난 결혼 후에  나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세례를 받기로 했다.

결혼 후에 그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고 강요가 이어지자, 여러 번 심하게 다투게 됐다.

결과적으로는 남편이 몇 마디 말로 사과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었다.


신혼 때 일까지 나오자 남편은,

"왜 자꾸 예전 일까지 말하는 거야? 지금 문제 되는 것만 말해."

라며 더 화를 냈다. 순간적으로 나도 화가 치밀어,

"나도 왜 자꾸 말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진짜 사과로 안 느껴져서 마음에 남은 거겠지! 진정성이 있었다면 내가 이럴까!"

남편은 갑자기 멍한 얼굴이 되어 나를 몇 초간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신혼 때 일에 대해 진짜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과는 빈껍데기가 아니라 달콤한 알맹이를 갖고 있었다.


진정한 사과에는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

첫째, 잘못한 일에 대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설명을 할 것.

둘째,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할 것.

셋째, 사과의 이유를 말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할 것.


그는 이 조건을 골고루 지키며 사과를 했고,

신혼 종교 다툼에 대한 앙금은 십수 년 만에 해소되었다.

신기한 것은 정말 이제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깊고도 깊은 사람의 마음은

어딘가 약점 같은 얕은 구석이 있어,

정확한 답을 갖고 오면 큰 선물을 주는 것 같다.


복직을 하고 8월이 지나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도 한풀 꺾였고,

하늘은 더 파랗게 물들었다.

건조하고 차가운 표정들을 볼 때마다

숨을 몰아 쉬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본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퇴근 후 두근거림과 불안증이 시작된다.

약을 끊고 복직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나를 고소한 학부모에게,

소리를 지른 관리자에게,

윗선의 편을 들며 사과를 종용한 동료 교사에게,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다.

자기에게 피해가 올까 두려워

가볍게 내뱉는 사과 말고, 진짜 사과 말이다. 사과를 받고 싶은 상대의 마음을 우습게 보지 않고, 어른답게, 무겁게 말하는 진정한 사과 말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나에게 진짜 약은 그들의 진정한 사과라는 걸.

남편이 해준 사과에 십수 년 묵은 앙금이 사르르 녹은 것처럼,

그들이

사과만 해준다면 나에게 그보다 명약은 없다는 걸.


"증상이 심해지면 드세요."

라며, 걱정스럽게 나를 보던 신경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 아직 남아 있는 약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니다.

이건 답이 아니다.

되뇌며 얼핏 잠이 들었는데,

그들이 꿈에 나타나

내가 원하던 방식으로 사과를 했다.

꿈에서마저 '이건 꿈이야.' 생각했다.

이상한 기분에 잠에서 깨어났다.

먹지도 않을 약봉지만

내 손안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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