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학교 안에서 고민하다
선생님으로 살며 가끔 울컥할 때가 있다. 지난 해는 유난히 마음 아픈 일들도 많고 최근에도 마음이 쿵 내려앉은 적이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던 사연은 ‘배우고 도전하다’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마음을 가다듬고 동료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동료의 개념을 물었을 때 중등 교사라면 같은 과목 선생님을, 초등교사라면 ‘동학년’으로서 함께 한 선생님들을 떠올릴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는 지도와 교직생활의 지배적인 범위가 바로 학년 내에서 이루어지는 셈이라서 동학년이 곧 동료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학교나 어느 해에는 ‘동학년’이라는 말은 개념으로는 있으나 실제 동학년에 해당하는 동료 선생님이 없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앞으로 아주 많은 학교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아주 흔한 현상이 될지도 모른다. 동학년이나 동료에 대한 어떠한 학술자료나 통계를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2023. 4. 1. 기준 전남의 '작은학교-전교생이 60명 이하인 학교'가 54.1%라는 전남교육청 작성의 너무도 또렷한 활자를, 충격적인 그 수치를! 그것이 슬프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 마음은 거창한 정책이나 전남이라는 땅,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부모님이나 학생들을 걱정하는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신규 교사가 동학년 없이 첫해를 보낸다는 것, 그것도 무려 20년도 더 지난 시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할 이야기는 많아진다. 마치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자신이 겪은 군대 생활의 생생한 기억들을 타인에게 아주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마음을 먹은 듯 사뭇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군대 이야기의 대부분은 비슷한 등장인물, 사건, 내용을 가진 듯하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이 비슷한 이야기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언제나 화자는 진지하다. 온갖 힘든 육체의 고통이나 노동, 그 당시만 해낼 수 있었을 초인적인 어떤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생 다시는 겪어보기 싫은 엄청난 날씨나 사람에 대한 경험이 떠오르면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상태를 나는 이해하는 것 같다.
그 시절의 경험치가 없는 누군가가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겪어본 이들로서는 ‘실제로 그렇게 살아본 경험이 없는데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 이해를 한다면 그 수준이 정말 내 경험과 견줄 깊이일까?’ 답도 없는 의문이 든다는 뜻이다. 그 시절 ‘교사’였던 사람이 겪었거나 기억하는 것과 지금 책을 읽는 ‘독자’의 짐작과는 사뭇 다른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은 당연하다.
풍랑주의보가 내리면 농협에서 운영하던 여객선마저 운항하지 못하여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는 그런 섬에 다섯 명이 같은 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나를 제외한 넷은 타시·도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함께 학교를 다닌 동료 이상의 유대관계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 그들 모두는 그 학교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 시도로 옮겨 갔다.
기존에 근무하던 선생님으로는 갓난아이와 사모님이 함께 살던 선생님 한 분, 교무부장 한 분과 출장이 잦던 선생님 한 분이 있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을 제외하고 담임교사는 그렇게 모두 여덟 명이었다. 두 명씩 동학년인 두 개의 학년을 제외하고는 동학년의 개념이 없는 학교였던 것이다.
나는 그 해에 1학년 담임을 맡았고 바로 옆 2학년은 당시 나의 아버지와 연세가 같은 교무부장님이 맡으셨다. 우리 반 학생은 모두 일곱 명이었는데 당연히 학생 실태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고작 일곱의 아이들이지만 사실 당연히!라는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모습과 격차를 보였다.
그 학교를 떠난 이후에도 오래 기억에 남는 일 중 ‘환경정리’가 있다. 갓난아기와 살고 계시는 선생님 한 분을 제외하면 주말에 가족들을 만나는 데 최소 3시간, 최장 7시간 이상이 걸렸던 우리는 주말을 제외한 여러 평일 밤낮 동안 환경정리에 정성을 들였다. 계절도 학기 초, 학기말도, 장학지도와도 관련 없이 말이다.
주말에 각자의 집에서 바리바리 싸 온 반찬들을 모아 관사 앞의 마당에 평상을 놓고 저녁을 공동으로 지어서 나누어 먹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때는 각자 나누어 무언가 크고 작은 일을 하기도 하고 기껏 몇 명밖에 되지 않는 학급의 아이들과 수업 이야기를 넉넉히 나누며 식사를 하고 설거지도 마친다.
그러고도 남은 수다를 떨어가며 운동장을 돌고 도는 운동까지 마쳐도 우리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초과근무도 아니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자의 교실로 다시 갔다. 모두 불을 켜고 무언가를 그리고 오리고 붙이고 떼었다가 다시 붙이고 서로 ‘환경정리’를 봐주러 다녔다.
지금의 온라인 교사 커뮤니티에서 사진으로 다른 교실과 선생님들의 솜씨를 구경하고 자료를 공유하는 행위와는 차원! 이 다르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누구든 오프라인 교사 네트워크인 우리에게 차원이 다르다고 말해주었어야 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단지, 같은 시간에 약속하듯 불을 끄고 나와 복도에서 관사까지 2분이면 가는 거리에서 서로 칭찬하며 깔깔거리는 일 외에는 없었다.
그래도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동료였다. 여러 날 밤을 옆 교실에서 나누던 의논과 격려 때문에 동료애가 쌓인 것은 아니다. 물론 그 후로 어느 해에도 보일 수 없을 정성과 디테일의 환경정리 때문도, 같이 밥을 먹은 횟수 때문만도 아니다.
주말에 풍랑주의보가 내릴 예정이라는 일기 예보에 집에 가고 싶다고 훌쩍 눈물을 보이던 동생 선생님, 어깨를 토닥이다가 울컥하는 마음이 번져 함께 훌쩍이던 다른 동생 선생님들과 늘 함께였다. 섬의 특성상 수신 전파 문제로 자꾸만 끊기는 휴대전화를 들고 돌이 막 지난 아이가 보고 싶다며 끊어졌다 걸었다 하며 저녁 내내 통화를 해대던 나까지 우리는 그렇게 생활의 많은 부분을 함께했다.
우리는 주말에 집에 오고 가는 일부의 길을 함께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지도를 바닥에 펼쳐 놓고 볼 때 가장 아래이면서 오른쪽이 집이던 네 명의 선생님들이 가장 아래이면서 왼쪽 끝의 섬에서 근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남이 집이던 내 코도 석 자였다. 모두 합쳐 코가 몇십 자였던 우리들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후로 이래저래 연락도 끊겼지만 ‘동료’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을 함께 하며 울고 웃었다.
동료애를 쌓으며 성장하고 있었겠지만 우리는 그 섬 학교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였다. 주말마다 소중한 가족과 헤어지고 주중이면 그리움을 견디느라 힘들었던 탓에 성장이나 미래를 생각하는 일은 뒷전이었다. 교무부장님과 교감 선생님은
“나중에 1년만 근무하고 섬을 나간 것을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야”
라며 극구 말리고 말리셨지만 우리는 조르륵 이동했다. 만약 지금 그 학교로 발령이 나고 그런 동료를 만나서 근무한다면 너무나 행복하게 잘 지낼 거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해 보았다. 이제는 어떤 날씨에도 운항을 한다는 대형 여객선이 생겼고 모든 이동통신사에서 중계기를 넉넉히 달아놓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은 군인정신 같은 힘이 우리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힘든 점도 많았지만 함께 이겨낸 그들, 첫해의 동료들이 새삼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