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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Feb 04. 2024

보호받지 못한 아이

학생의 진로, 나의 진로

공교롭고 급작스럽게도 내 첫 부장 보직은 무려 ‘교무부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사연은 길었지만 결정적으로 교무업무상 임박한 날의 전화 때문이었다. 교육청에서 오래 일하셨던 교장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는 시점에 직접 전화를 하시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해두자.

“첫 번째 부장이니까 배우면서 하면 되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있나요? 다들 하나씩 배워가면서 하는 거니까 한번 해 봐요.”

평소 말수가 적으신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설득을 하시는 통에 나는 덜컥 보험성 핑계 하나를 두고 부장직을 맡게 되었다. 어쩔 수 없던 이유 중 하나는 구성원들의 경력이었다. 위로는 ‘근가’ 호봉의 선생님 두 분과 건강 문제가 심각한 선배님 두 분, 아래로는 1급 정교사 연수를 받은 선생님이 단 한 분도 없던 학교였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던 탓에 하마터면 제비 뽑기까지 가겠다고 걱정을 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누가 교무부장을 맡아도 걱정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자타 모두가 걱정을 많이 한 보직을 맡게 되었는데 큰 걱정에 비해 나는 오히려 괜찮았다. 무식하였으므로 용감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바쁘게 돌아가는 교무의 일상은 걱정과 달리 오히려 활기를 주었다. 수첩과 달력에 빼곡히 적힌 업무와 일정을 해결할 때마다 줄을 그어가며 ‘해내었음’을 확인하던 기분이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잘했음’이나 ‘우수’도 아니었는데 그저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다행스러운 사실이 나를 교무부장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했다. 모든 일을 처음 해보는 것이라 그저 배우면서 신기하고 의욕이 생겼던 것 같다.

매일 새로운 인사말을 넣어 보낸 일일 교육활동 안내에 친근하게 응답하던 동료들도 참 좋았다. 갓 신규 발령을 받고 온 선생님도 여럿이라 교사의 구성이 정말 양극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래서 중간 경력의 교사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중요했다. 1급 정교사 연수를 앞둔 후배 몇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서로 업무를 공동으로 이야기하여 방향을 만들어가고 다독였다. 그 수밖에 없었다. 회의와 메신저로 의견을 나누고 서로에게 배워가며 한 단계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해가 기억에 남는 더 큰 이유는 교무부장으로서의 기억 때문이 아니다. 수시로 쓰러지는 지병을 가진 6학년 여학생 K때문이다. 쓰러지는 모습을 처음 보던 날, 교실에서 수업을 받다가 꼿꼿하게 선 자세로 철퍼덕 쓰러지는 모습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다. 구급차에 실려가고 응급실에 도착했는데도 보호자인 할머니는 급하게 달려온 모양새로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그랬는지 같이 사는 유일한 식구인 손녀가 쓰러지는 것에 동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멀리 떨어져 노동자로 일하며 지내던 아빠는 통화도 어려웠다. 연결되어도 진지한 상담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퇴원 후 가정 방문을 해서 본 집은 2000년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수준이었다. 단층 주택에 개별 욕실, 화장실이 없는 것은 물론 여러 세대가 쓰는 마당 가운데 공동 수돗가가 있을 뿐이었다. 집에서는 씻을 수 있는 실내 공간이 없으니 위생과 건강, 인권 등 총체적으로 심각했다. 아빠가 밤낮으로 어렵게 벌어서 보내주는 돈은 상당했지만 할머니는 다른 곳에 쓰고 학생에게 폐품까지 주우러 다니게 한 것이다. 아빠는 할머니의 말에 속아 이 모든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대로 둔다면 중학교 진학 후에도 상황은 뻔할 것 같아 끈질긴 연락 끝에 학생의 아빠를 만났다. 당시 개교 예정인 기숙형 중학교 정보, 필요한 각종 복지정책 등을 비교, 안내하여 진학하도록 설득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학생을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힘들게 한다는 것에 동의한 아빠가 몇 가지 결단을 내렸다. 아빠가 따로 알아봐 할머니는 알맞은 시설에 모시기로 하고  딸은 기숙 중학교로 진학시키기로 했다. 입학 후 적응을 마친 K가 나에게 연락을 하며 고마워했다. 자꾸만 쓰러지던 지병은 치료가 되지는 않았지만 증상이 생긴다 해도 교실이든 기숙사든 항상 친구들이 있는 것이 오히려 안심이라고 했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 때보다 발견되기도 돌봄을 받기도 수월해졌다며 목소리가 한껏 밝아졌다. 그 목소리와 까맣던 얼굴, 길게 늘어뜨린 말총머리의 K를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K를 돕기 위하여 여러 기관에 연락하며 정보를 찾았던 것을 시작으로 나는 진로진학 분야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진로 진학'이라는 말은 주로 대학입학을 위한 준비 정도로 생각되던 때였다. 이를 계기로 대학원 전공 및 이후 지인과 가족들의 진로, 진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니 나도 커다란 배움의 선물을 받은 셈이다. 또한 가정방문을 시작으로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의 학생들에 대해 교내외 생활지도 및 선도 활동을 하게 된 것도 의미 있었다. 인근 중·고등학교 폭력 모임에 연루된 학생들을 찾아 경찰서와 연계하여 선도함으로써 관련 포상도 받았으니 뜻깊은 한 해였다.

그래도 교무부장을 1년쯤은 더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은 가끔 한다. 학교 일 전체를 좀 더 아우르고 통찰력 있게 바라볼 수 있었을 기회였는데 그때 이어서 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 것이 지금은 가끔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 해의 의미는 다른 곳에 있었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의 진로를 고민하고 도왔던 시간에 있었다. 그를 계기로 나의 진로에 좋은 딴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덤으로 온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K는 나에게 감사를, 나는 K에게 감사를 보낼 일이 그 해에 있었다고 기억하고 싶다.


#동료 #진학 #진로 #지병 #보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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