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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Jan 28. 2024

섬 마을 학교에

작은학교에 있던 커다란 선생님들을 기억하며

생생한 군생활의 기억을 타인에게 전하는 군 전역자는 언제나 진지하다. 온갖 힘든 육체의 고통이나 노동, 그 당시만 해낼 수 있었을 초인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생 다시는 겪기 싫은 경험과 사람, 혹한의 날씨 이런 것들에 대해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상태를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군대를 다녀온 것도 아닌데 사뭇 비장한 마음으로 내 이야기를 하려 한다. 무려 20년도 더 지난, 신규 교사 시절의 나에게는 '동학년' 선생님이 없었다. 그래도 동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동료'라는 말에 초등학교 교사들은 주로 ‘동학년’ 선생님을 떠올린다. 교육과정, 생활지도, 자료 공유 등 많은 활동으로 1년을 함께 보내는 중요한 관계다. 그런데 최근 학령인구 감소로 어떤 학교나 어느 해에는 ‘동학년’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심지어 앞으로 더 많은 학교에서 이러한 현상이 흔히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2023. 4. 1. 기준 전남의 '작은학교: 전교생이 60명 이하인 학교' 비율이 54.1%라는 너무도 또렷한 활자를, 충격적인 그 수치를! 그리고 슬프고 걱정이 되었다. 이 마음은 거창한 정책이나 전남이라는 땅,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부모님이나 학생들을 걱정하는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풍랑주의보가 내리면 농협에서 운영하던 여객선마저 끊기 섬 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먼 타시·도에서 나고 자라 학교도 인접 지역이었던  유대관계로 자매 같던 네 분, 그리고 나는 신규 발령이었다. 인근 광역시가 집인 연세 많은 전입동기 두 분, 기존에 계시던 교무부장님과 부장 선생님  분까지 담임은 모두 열 명이었다. 지역, 성별, 연령도 제각각에 절반은 동학년도 없어 동료애를 기대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조합이었다. 이 소규모 섬마을 학교에서 첫 담임을 맡았다.


주말에 가족들을 만나는 데 최소 3시간, 최장 7시간 이상이 걸렸던 우리는 평일에 많은 것들을 함께 했다. 육지 집에서 바리바리 싸 온 반찬들을 들고 관사 앞마당 평상에서 공동으로 저녁을 지어 먹을 때도 많았다. 크고 작은 일을 맡아 하고 몇 되지 않는 자기 반 아이들과 수업 이야기를 넉넉히 나누며 식사를 하고 설거지도 마친다.

그러고도 남은 수다를 떨어가며 학교 뒷산을 오르거나 운동장을 돌고 도는 운동까지 마쳐도 우리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초과근무도 아니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자의 교실로 다시 갔다. 무언가를 그리고 오리고 붙이고 떼었다가 다시 붙이고 서로 ‘환경정리’를 봐주러 다녔다. 어떨 때는 교육과정일 때도, 시험 문제일 때도, 학습지 자료일 때도 있었다. 같은 시간에 약속하듯 불을 끄고 나와 복도에서 관사까지 2분이면 가는 거리에서 우리끼리 칭찬하며 깔깔거렸던 밤이 수없이 많았다.

지금의 온라인 교사 커뮤니티에서 다른 선생님들의 솜씨와 교실을 구경하고 뛰어난 학습 자료를 공유하는 행위와는 차원! 이 다르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누구든 오프라인 교사 네트워크였던 우리의 노고나 열정에 감동하거나 칭찬의 말을 해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일기예보에 주말, 풍랑주의보라는 말이 나오면 누군가 집에 가고 싶어 훌쩍 눈물을 보인다. 송수신 전파 문제로 자꾸만 끊기는 전화를 붙들고 저녁 내내 통화를 시도해 대던 나도 가세한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의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리고 안녕, 인사말을 건넬라치면 우리는 합창으로 하나가 되었다. 서로 어깨를 토닥이다가 울컥하는 마음이 번져 함께 울었다. 어느새 영양 선생님의 네다섯 살 아들, 딸 그리고 보건 선생님과도 식구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 놓고 볼 때 가장 아래이면서 오른쪽이 집이던 네 명의 선생님들이 가장 아래이면서 왼쪽 끝의 섬에서 근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도 서울의 남편도 뿔뿔이 흩어져있던 내 코도 석 자였다.

모두 합쳐 코가 몇십 자였던 우리들은 주말에 집에 오가는 일부의 길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렇게 생활과 마음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하며 '동료’라는 이름으로 그 섬에서 살아갔다. 아무도 우리의 웃음과 눈물을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동료였다. 여러 날 밤을 옆 교실을 오가며 나누던 의논과 격려 때문은 아니다. 그 후로 어느 해에도 보일 수 없을 정성과 디테일의 환경정리 때문도, 같이 밥을 먹은 횟수 때문만도 아니다.


그렇게 동료애를 쌓으며 지냈지만 우리는 그 섬 학교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였다. 주말마다 소중한 가족과 헤어지고, 주중이면 그리움을 견디느라 힘들었던 탓에 성장이나 미래를 생각하는 일은 뒷전이었다. 교무부장님과 교감 선생님은

“나중에 1년만 근무하고 섬을 나간 것을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야”

라며 극구 말리고 말리셨지만 우리는 조르륵 이동했다. 만약 지금 그 학교로 발령이 나고 그 동료들을 만나서 근무한다면 너무나 행복하게 잘 지낼 거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해 보았다. 이제는 어떤 날씨에도 운항을 한다는 대형 여객선이 생겼고 모든 이동통신사에서 중계기를 넉넉히 달아놓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은 군인정신 같은 힘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힘든 만큼 더 뜨겁고 단단한 연대의 2023년을 보내며 내 옆의 선생님에게서 첫 해의 동료들이 겹쳐져 보였다.


#주의보 #주말 #동료 #발령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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