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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Jan 24. 2024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초보 실수로 비슷한 글을 올리게 됨을 사과드리며, 누군가의 가족

그렇게 무섭던 '죽을 死, 사선'을 타고 섬에 들어가야 했다는 것은, 공공 업무를 맡은 이들이 출근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지각을 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 날이면 ‘근무 태만’의 내용으로 기관마다 줄줄이 민원이 접수되었다. 반복되는 민원과 민원인을 탓할 수 없을 만큼의 섬 환경과 생활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해하면서도 피폐하고 가혹한 현실이라 느끼며 그 원인은 섬 주민들의 억울함! 때문이라고 결론짓곤 했다. 그래서 사선을 타고라도 섬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작은 규모, 적은 인구의 섬이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일들은 이루어져야 하므로 섬 안에는 각종 공공기관이 있었다. 여객선 운항과 어선들의 면세유를 담당하는 농협과 수협, 금융, 보험, 택배를 관리하는 우체국은 물론 보건소, 면사무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등등 기관이 많았다. 각 기관의 종사 인원도 꽤나 많아서 우리는 주민과 근무자의 비율이 궁금한 적도 있었다. 섬 주민들은 우리가 밥 벌어먹고사는 이유가 섬이 거기에 있고, 주민들이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므로 근무 시간뿐만 아니라 감사와 봉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당연한 논리이고 맞는 말이었지만 반대로 각 기관 근무자들은 서운하거나 답답한 대목이었다. 섬 주민들도, 그 속에서 근무하는 우리도 스스로 불쌍하고 억울했던 시기였다. 민원도 무섭고 사선도 무서운 우리는 그리하여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살아갔다. 냉정한 섬 생활을 견디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떨 때는 일요일 마지막 배-육지의 시간이 아까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이른 오후 4,5시-로 섬에 들어가거나 섬 주민들이 파는 식료품을 사거나 그들의 가게에서 회식을 하거나 여가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비싼 값으로 사선을 탔지만 그래도 그건 괜찮았다. 근무하는 내내, 섬 안에서 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찾지 못한 것에 비해서는. 그래서 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에 비해서는.     

  

글을 읽는 젊은 누군가는 육아휴직을 충분히 쓰면 되지 않나? 이해조차 어려울 것이다. 출산과 첫 발령의 날짜가 너무 가까웠고 2000년을 갓 지난해였고 하필 섬이었다고 밖에 돌이킬 수 없다. 처음 섬에 간 날, 육아휴직을 신청하자 모두 난감했다. 기간제 교사를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다시 구하면 그만두고, 구하기를 반복할 것이 뻔해서였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는 기간제 교사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며 조기 복귀 부탁까지 하신 교감 선생님은 지금 생각하면 밀당의 고수였던 것 같다. 휴직 중인 나에게 전화하셔서 내 근황을 묻기도 하시고 내 아이와 비슷한 손자가 있으시다며 격려와 응원도 보내주셨다. 다달이 통화하며 라포가 형성되었는지, 젊은 날 서울의 외벌이로는 육아가 어려웠는지, 말로만 듣고 있는 업무가 오랜 공백으로는 버거울까 겁이 나서였는지 어느새 휴직 연장을 포기하게 되었다. 당시 1년 이상 육아휴직 수당이 있기는 했던가? 기억도 없지만 딱 한 번 섬에 가보았던 나는 섬의 환경과 일상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조기 복귀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그때는 몰랐다.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 버린 그 시간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복직을 앞두고 일단 섬 안에서 아이를 돌보아 줄 사람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린이집은 없었고 상당한 시간이 흘러도 돌쟁이 아이를 돌보는 시간제 일을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부모님이 돌보아 주시기로 했다. 섬 안에서 아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에 급히 갈 수 없다는 문제도 있어서 육지에서 기르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남편은 서울에서, 나는 남서쪽 끝 섬에서, 아이는 남동쪽 마을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생이별의 삼각지대를 오가며 주말마다 자식과 헤어지는 우리 부부가, 부모님들에게는 마음 아픈 자식이었으니 우리는 모두 아픈 사랑을 했던 때다.

아이는 어리고 남편도 만나기가 어려우니 참 많은 통화로 마음을 대신했다. 한참 말을 하다 보면 응답이 없다. 끊긴 줄 모르고 혼자 말하다 다시 통화를 시도하지만 실패할 때가 많아서 통화를 포기할 때쯤 문자가 날아온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문자라도 정상적으로 오는 게 다행이었다. 어찌 그리 전화는 잘 끊기는지 기지국 정비를 해도 해도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그 섬은 거리만큼 통화의 감도 멀었다. 견디다 못해 통신사를 바꾸기도 했다.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지금의 IT강국 대한민국이 있나 보다.           


콜센터에 전화하면 상담사 연결 대기 시간에 이런 멘트가 나온다. 누구나 들어보았으리라.

“지금 통화를 하실 상담사는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라는 말과 함께

“사랑합니다. 고객님.”

이라는 응답도 들려온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문제에 닥칠 때 콜센터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난감한 문제를 들어주고 해결 방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상담사는 상당한 안도감과 고마움을 준다. 누구든 도움을 주기만 할 수 없고, 받기만 하는 경우도 없다. 서로에게 상담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연결되고 확장된 현대의 사회망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인 셈이다. 조화롭고 원활하게 영위되기 위해 ‘가족’과 ‘사랑’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아야겠다.

소중하지만 늘 함께 하고 있어 모른 채 지나친 가족에게 표현 못하는 말을 남겨본다.

"사랑합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출근 #지각 #콜센터 #문자 #민원 #육아 #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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