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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Jan 21. 2024

죽을 死, 사선을 타고

팍팍함을 이해하기까지

20년도 더 지난 내 첫 발령지 학교의 구성원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팍팍했었다. 가족만큼 가까웠고 서로를 잘 챙기며 각기 따뜻한 면모도 갖추었지만 이러한 인성과 상관없이 아무튼 그랬다. 꼭 누구 때문은 아니었는데도 섬에서 지내는 자체로 그저 예민했고 안타까웠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 살았어야 한다면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여유 없는 그 마음이 억울함에서 왔으며 그 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나중에는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대개 시골이나 섬에 대하여, 혹은 그곳 사람들에 대하여 따뜻하고 정 많고 푸근한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경험상 그 생각이 맞는 경우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하고 사람과 사람으로 대할 때로 한정되는 것 같다. 얼굴과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달랐다. 자신만 피해를 보는 것 같은 억울함을 어떻게든 풀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래야만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익명과 감정의 이치를 그 섬에서 알게 되었다.     


주말을 앞두고 다행히 바람이 고 파도가 높지 않다면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 5일 근무제가 아닌 때라 주말은 특히 더 짧았다. 그래도 섬 밖에 있는 집에 다녀올 수 있고 육지 시간과 문물들에 잠시 행복했다. 그런데 월요일 새벽 첫 배가 떠야 할 때 높은 파도가 간혹 문제였다. 공식적인 방법으로는 섬에 들어갈 수단이 없으므로 선착장에서 발을 구른다. 이런 상황을 자주 겪어 본 섬 주민 일부는 지금으로 치면 세컨드하우스를 육지에 마련한 경우가 꽤 있었다. 풍랑주의보가 해제되어 정기여객선을 탈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것이다. 섬의 원주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걱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꼭 섬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졸이다 결국 몸이 더 졸아드는 ‘사선’이라는 것을 이용하기로 한다. 사선을 타는 사람들 십중팔구는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의 직원들이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무모한 짓이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지금은 사선을 타겠다고 모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맞다.          

우리가 사선을 타고 섬에 도착하기까지는 여러 단계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먼저 ‘운항을 해주겠다’고 나서는 몇몇 선주와 배를 섭외하고, 선주가 부르는 가격을 비교하여 탈 사람들이 의견을 모은다. 배와 선장이 정해지면 배의 크기나 인원에 따라 내야 하는 돈을 결정하고, 앞장선 누군가가 현금을 걷는다. 선장에게 뱃삯을 건네고 나면 드디어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며 또 가슴을 쓸어내린다. 선장은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짐과 사람의 자리를 알맞게 배치한다. 배가 기울지 않도록 무게 중심을 잘 잡아야 그나마 덜 힘들다. 그래서인지 사선의 승객들은 하나같이 선장에게 신뢰인지 복종인지를 자처한다. 조심조심 모두 배에 올라 자리에 앉고 나면 드디어 배가 출발한다.           

드디어!라고 했지만 얼마 전까지 섬에 들어가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던 조바심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이내 거친 파도를 뚫고 가야 하는 현실과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작은 배가 주는 불안함과 위험을 감지하게 된다. 어떻게든 섬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마음도 막상 이 순간에는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자리에 무사히 배정받았다는 안심이나 곧 섬에 도착할 것이라는 안도감 따위는 온데간데 없어진다. 출발하기도 전부터 후회가 된다. 자리에 앉아서 배 밖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파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두근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정규 여객선에 비해 우리의 ‘사선’은 너무나 위험했다. 일단 규모부터 정기 여객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십 톤 덤프트럭을 포함하여 차를 수십 대씩, 거기에 사람들도 가득 싣던 배에 비해 턱없이 작다. 선실마저 없었던 작은 어선 ‘선외기’는 공포감 자체였다.

           

특히 처음으로 사선을 타고 섬으로 들어갔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잊히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선배 선생님들께 듣던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배가 출발하기 전, 출산을 앞둔 산모처럼 진지하고 엄숙하게 심호흡을 해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갑판 위 자리에 앉아서 눈을 돌리면 내 어깨보다 더 높이 솟아오르는 파도가 무서웠다. 달리기 시작하면 엄청난 속도감과 양쪽으로 기울어지는 배의 각도가 더 어마어마한 공포를 주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고 그럴 때면 질끈 감았던 눈을 잠깐 떠보았는데 파도가 내 어깨 바로 앞에 있곤 했다. 배의 기울기는 체감상 거의 90도에 가깝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모든 인원이 구명조끼를 입는 것이라도 당연했겠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일반 소형 어선이라 정원을 몇 배나 넘긴 예외적인 상황에 우리 몫의 구명조끼는 있을 리가 없었다. 비바람도 곤혹스러웠다. 실제로 비가 오면서 파도가 높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비가 아니라도 파도에서 생겨난 수많은 물방울들로 인해 비가 내리는 듯할 때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 배의 바깥쪽에 앉은 사람들 위주로 비옷이나 간단한 비닐,  포장 종류를 둘렀다. 하지만 머리 위, 바닥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놀이동산의 스릴을 즐기는 그 누구라도 이런 경험 앞에서는  희열을 느끼지는 못할 거라고 확신했었다. 호기심 많고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처음 사선을 탄다면 배가 커다란 파도를 가르면서 가는지, 파도의 곡선에 따라 파도타기를 하는 방식으로 가는지 관찰하거나 궁금해할 겨를도 없을 라고도 생각했다. 물론 배에서 내린 후 확신한 내용이다.

안전하게 내렸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얼마나 걸려 도착하는지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꽤나 빠른 속도로 달렸을 텐데도 모터 소리나 배의 기울기로 인한 공포감 때문에 너무나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에서 내리면 잔뜩 겁을 먹고 긴장했던 마음은 다소 가라앉지만 다리가 후들후들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정규 여객선에서는 괜찮았던 뱃멀미를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런 배를 사사로울 사 ‘私’가 아니라 죽을 사 ‘死’ 자를 쓰는 사선이라고들 했다. 그 표현이 맞다는 것은 그 상황을 경험했던 사람들만 안다.    

다른 섬 연육교에서 그 섬을 떠올리며

언젠가는 내 시동생과 동서 내외가 멀리 경기도에서 여행을 오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섬에 들어오기로 한 날까지는 풍랑주의보가 내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곧 주의보가 내릴 것 같다고 나이 많은 섬 토박이인 학교 주사님이 말씀해 주셨다. 바람과 파도를 볼 줄 모르는 나는 TV의 일기 예보만 믿고 선착장까지 오라고 했는데 낭패였다. 섬에 들어와서 적어도 1박을 하고 다음 날 섬을 조금이나마 둘러보고 오후 마지막 배 시간에 가려는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다.

풍랑 주의보 등 기상이 안 좋을 때는 섬으로 들어오는지, 나가야 하는지에 따라 상황이 다르다. 보통 섬으로 들어올 때는 섬 안의 공무가 멈추므로 사선을 타고라도 여러 공무원들이 들어온다. 하지만 그들이 섬 밖으로 못 나가는 경우는 그 가족들만 안타까울 뿐이므로 결국 갇히는 꼴이 된다. 공무가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 배의 비싼 돈까지 주며 사선을 타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설령 들어왔다가 사선을 타고 나갈 각오가 되어 있더라도 난관은 또 있다. 배가 못 뜨면 육지의 식재료나 생필품 등을 섬 안으로 공급받는 데 차질이 생겨 식당도 문제였다. 섬 밖으로 못 나가는, 식재료 떨어진 공무원들이 많이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를 찾은 손님에게 같은 돈을 주고 질 낮은 식사를 대접하는 꼴이 되게 생겼다. 1박 2일 대여섯 끼를 생선회와 매운탕만 먹여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시동생 부부는 선착장까지 왔다가 되돌아가야 했다. 나에게는 답답한 일,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서운한 날이었다. 섬에 근무하는 동안 나를 응원해 주거나 섬의 경치와 생활이 궁금해 찾아오고 싶어 했던 다른 가족, 지인들에게도 이제야 말해본다.

그리고 이 위험한 곳에서의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그 후로도 나는 왠지 아주 오래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을 살피지 못하고 살았다. 이제 와서 먼 옛날 찾지 못한 많은 경조사들을 떠올린다. 찾아가 그 안에서 함께 웃고 함께 울어주지 못한 소중한 친구들도 마음에 걸린다. 다만, 미안하고 안타까운 기억을 여태 갖고 살고 있었노라는 고백으로 난감하고 미안했던 내 마음을 대신한다.     


#놀이동산 #공무원 #1박 #고백 #일기예보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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