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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May 17. 2024

나, 다시 돌아갈래

그땐 그랬지

40여년 전,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굳게 믿었다. 우리 선생님과 친하고 가까운 사람은 우리 반 학생들 뿐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말이다.



오래된 영화 속이라도 되는 듯 아름답고 조그맣고 학생 수마저 적은 시골 학교였다. 고작 한 동인 교사(敎寺) 바로 뒤에는 선생님들이 지내시는 관사(官寺)와 또 바로 이어진 뒷산이 있었다. 작고 작은 교문에서는 걸어서 1~2분 거리에 바다가 펼쳐져 있던 나의 첫 학교!

지금 가보아도 산과 바다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가까우며, 게다가 그 공간 안에 학교와 운동장과 우리들이 모두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한 작고 아름다운 학교에 나는 다녔었다. 내 기억으로 바닷가 작은 마을 분교에 선생님은 모두 해봤자 두 분이었다. 

그렇게 작은 학교였으니 얼마나 서로에게 밀접했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서로 가깝게 지내지 않을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도 우리 1학년은 무려 열 명이나 되는 학생이 있어서 담임선생님이 온전히 우리만 가르치셨던 것 같다. 

게다가 우리는 하교를 하고 나서도 틈만 나면 선생님의 관사에 갔었다. 열 명이 모두 모이는 날은 별로 없었지만 항상 네다섯 명은 배를 깔고 엎드려 관사 방바닥에서 숙제를 했다.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거나 이야기를 하다가 깔깔거리거나 무엇을 하든 즐거운 때였다.          



그때는 알림장, 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아무튼 나는 알림장을 썼다. 그러다 지우고 다시 썼다. 선생님이 실수로 수학 숙제의 쪽수를 잘못 쓰셨다고 섣불리 생각하면서.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숙제는 13~37쪽 뭐 이런 정도의 양이었다. 당시 무척이나 야무지고 똑똑하다고 자만에 빠져있던 나는 그만 큰 결심을 내렸다. 1학년의 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해결해 낼 수 없는 숙제를 우리 선생님이 내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것이다. 그렇게 친절하던 선생님이, 평소에 우리를 더없이 사랑하시던 그 선생님이 그러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질문조차 하지 않고 알림장의 숫자를 고쳐서 썼다. 그날 배웠던 곳 언저리의 어느 쪽수를 썼던 것 같다.          

잘난 척 레벨이 하늘을 찌르던 나는 공부가 재미있었고, 숙제를 잘해서 칭찬받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던 때였기 때문에 으쓱하며 숫자를 썼다. 뭐 13~20쪽 정도로 썼던 것 같다. 그 정도면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반 열 명 중 가장 많이 풀어오는 학생일 것이라는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는 뭔가 큰 전략을 들키면 안 될 것처럼 그날은 선생님의 관사가 아니라 우리 집에 가서 혼자 숙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계획대로 아주 열심히 숙제를 했다. 팔이 아파서 도저히 더 할 수 없을 정도일 때 숙제를 끝냈다. 밖은 이미 깜깜해졌다. 나는 자랑스럽게 칭찬받을 것을 짐작하며 아빠에게 검사를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빠가 심각하셨다. 숙제를 펴보라고 할 때도 숙제를 적은 공책을 가져오라고 할 때도 표정이 달랐다.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아빠가 물으셨다.

“오늘 숙제가 뭐야?”

“산수 13쪽부터 20쪽 까지요.”

“숙제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산,   수,   13쪽부터    20쪽  까지요.”

“산수 책 펴 봐.”

나는 책을 펼쳐 보이며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그럼 숙제 적은 공책 펴서 갖고 와 봐!”

내가 대답을 잘한 것 같은데도 아빠는 자꾸만 숙제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를 물으셨다. 큰 목소리가 아니고 오히려 낮은 목소리에 나는 슬쩍 겁이 났다. 차근차근 복습하며 풀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내가 너무 한꺼번에 많이 풀어서 그런가? 혼자 생각했다. 공부를 많이 하는 거니까 괜찮겠지? 다시 혼자 생각할 때 아빠 목소리가 커졌다.

“숙제를 적은 숫자는 왜 지우고 다시 썼어?”

“선생님이 숙제를 너무 많이 내주셨는데 숫자를 잘못 쓰신 것 같아서요.”

라고 말했지만 갑자기 자신이 없었다.          



아빠는 사실, 그날 우리 반의 다른 친구들의 아빠 여럿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오셨다. 그리고 그 저녁 식사에는 집 멀리 떠나오신 나의 선생님도 함께였다. 시골 마을 관사에서 지내시며 또래였던 우리의 아빠들과 친해지셨으리라. 나만 까맣게 몰랐을 뿐.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빠들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오셨다. 선생님은 우리가 맨날 관사에 와서 낄낄거리며 공부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는 습관을 바꾸고 싶으셨나 보다. 1학년 때 공부하는 태도를 바르게 가져야 하는데 너무 장난을 치는 분위기가 되었다고도 말씀하셨다고 했다.

관사에 모여서 하든, 집에서 하든 숙제하느라 고생도 해보고 어려운 숙제 앞에서 진지하기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단다.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숙제를 내줬으니까 집에 가시면 어떻게 숙제를 하는지 잘 살펴보시라고까지 하셨단다. 그래서 아빠는 다 알고 계셨다. 어차피 숙제를 다 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그런데 그 확신의 아빠 앞에서 더 확신에 찬 여덟 살 딸이 숙제를 다 했다고 했으니 아빠는 확인 작업에 돌입하신 거였다. 그날 저녁 아빠의 결론은 

“선생님은 항상 옳으시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자신을 속이면 안 된다.” 

였다. 그런데 내가 너무 확신에 찼었는지 그 후로 너무 충격을 받아 잊은 건지, 그때가 너무 어릴 때라 기억에 오류가 있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더 커다란 결론이 내려졌다.

“거짓말하는 딸은 필요 없으니까 나가 있어.”

나는 얼른 방문 밖으로 나갔다. 아빠가 거짓말을 안 하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을 자신이 있을 때 들어오라고 하시며 더 멀리 나가서 반성하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대문 기둥 옆으로 갔다. 어두워진 마당이라 낮에 신나게 땅따먹기를 하던 곳이지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빠가 자신이 있으면 들어오라고 하셨는데 자신이 안 생겼다. 또 선생님이 숙제를 말도 못 하게 많이 내주시면 어떻게 하지? 에 대한 답이 내려지지 않아서였다. 그때 아빠가 다시 나를 발견하셨다. 반성하지 않았으면 더 멀리 나가라고 하셨다. 그래봤자 대문 옆은 내 친구 C의 집이고 또 반대쪽 집은 한 학년 위인 I의 집이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 자식을 훈육할 때가 되니 그날 아빠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빠는 내가 더 먼 곳으로 신체를 이동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중요한 마음을 깊이 새기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몰랐다. 몰랐으니까 땅따먹기 했던 자국을 자꾸 발로 덮으면서 나는 대문 바깥으로 정말 나갔다. 그리고는 하나의 딴생각을 했다. 

엄마는 그날따라 다른 동네에 있는 큰집에 다녀오신다고 했다. 곧 엄마가 오실 것 같았다. 나는 반성을 다 했는데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라고 합리화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엄마가 저 멀리서 걸어오셨다.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달려가 푹 안겨 울었다. 

그리고는 엄마가 무거운 짐을 들었는지 떡시루를 머리에 이고 있었는지도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꺼이꺼이 해댔다. 엄마는 짐이 무거운지 떡시루가 쏟아질지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안아주고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 바람에 나는 또 힘을 얻어 반성을 다 했다며 선처를 빌었으리라. 

다행히 나의 반성과 다짐, 그동안의 성실한 공부 태도를 참작해 주신 아빠의 너그러운 은혜 덕분에 다시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미 빠질 것 같은 팔로 나는 21쪽부터 숙제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아마 37쪽까지는 못했을 거다.           

나중에 자라면서 이야기해 보니 그날 아빠에게서 쫓겨나서 다시 돌아온 시간은 길지도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참 위대하게도 그날의 시간이 그렇게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위대한 자산을 얻었다. 엄마와 떡시루도 내 삶의 모든 엄마가 되어 있다. 다만 나는 짐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부모가 되어 있나? 선생님인가? 싶어서 뜨끔할 때가 있다.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의 크기


그리고, 그 후로 나의 1학년 선생님께, 뒷산에 올라 칡잎으로 깔때기 모양을 만드는 것도 배웠다. 겨울에는 토끼의 다리 길이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몰아야 토끼를 잡을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우리 반 모두가 사랑했고, 우리 반 모두를 사랑해 주셨던 선생님.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글씨를 잘 쓰시던 나의 첫 담임선생님. 정성스럽게 써 주신 생활통지표가 누렇게 변하는 동안 그걸 꺼내볼 때나 겨우 평안하고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바랐다. 

그동안 못 찾아뵌 죄송함을 여기에라도 남겨본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 40년도 더 지난 기억이고 교권, 훈육 방법, 아동학대 등의 문화가 다른 시대였으며 무엇보다 받아들이는 제가 소중하게 간직한 기억입니다. 따라서 이 내용을 바탕으로 나의 은사님이나 부모님이 비난받는다면 무척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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