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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May 03. 2024

뜨거운 감자,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학부모라는 이름

학교의 여러 변화 중 학부모의 범위가 보호자로 확대되는 점에 주목해 본다. 양성평등의 사회이고, 자녀의 수는 줄었으며 맞벌이 가정이 많은 이유도 한몫한다. 예전에는 학생 관련 연락을 받겠다는 연락처가 주로 엄마의 것이었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아빠나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이모라 불리는 친 이모가 아닌 여러 여성)까지도 보육과 돌봄에 힘을 보태는 가정이 많다 보니 생긴 현상이다. 경우에 따라 학생 수가 스물이면 학부모 연락처는 쉰 개가 넘을 때도 있다. 모두 통일해서 ‘보호자’라 하련다.

그들과의 소통은 가장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숙제다. 뜨거운 감자다. 보호자는 학생을 교육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는 존재라서 가장 중요한 교육 주체라 생각한다. 학생들이 어리기 때문에 보호자의 도움과 손길이 더 많이 미치는 초등학교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학부모이다. 학부모이면서 교사이다. 그래서 학부모의 특성을 가지고 우리 반 학부모와 상담을 하기도 한다. 나의 아이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교사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하듯이.

이렇게 두 부류에 교집합으로 살아온 시간은 교직 생활의 절반을 훌쩍 넘어섰다. 그러는 동안 교사도 학생도 변해왔듯이 보호자의 변화 또한 크다고 느낀다. 그리고 감히 말하자면 학생과 보호자의 특성은 정말 흡사하다! 누구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 과오와 실수를 통해 되짚어 보려 한다.           


걱정 많은 나의 성향은 부모로서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드러났다. 첫째가 저학년일 때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부담을 크게 가지고 생활했었다. 어른들에게서 칭찬을 많이 받을수록 아이는 더 잘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몸의 불편쯤은 더 감당해 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는 예고를 들으면 아이는 며칠 전부터 화장실에 가기를 어려워할 정도로 긴장했다.

그 어려움과 변화를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다. 그 사실을 몰랐으니 늘 성실하게 준비하고 공부하는 아들이 그저 의젓하다고만 여겼다. 항상 결과가 좋아서 나중에는 그마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아들은, 담임선생님께도 모범적으로 공부하려 애쓰고 나에게도 착한 아들로 생활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자각하고는 궁리 끝에 결정을 내렸다. 내가 출근하는 학교와 아이가 등교하는 학교가 같은 것이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학교를 분리하는데 지역마저 다른 탓에 계획에 없이 아이에게 휴대전화를 사주게 되었다.           

전학을 간 후 우리는 조금 더 안정되고 여유를 찾은 것 같다고 생각할 무렵 이런 일이 있었다. 첫째가 4학년 때다. 아이가 다니고 있던 가지의 학원 시간 중간에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물었다.

“지금 학원 끝나고 간식 먹고 다음 학원으로 가려고 해요.”

평소 성격이나 규칙적으로 생활해 오던 행동으로 볼 때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번째 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가 아직 학원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전화를 해 보았지만 아들은 받지 않았다. 걱정도 되었지만 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속사정은 그날 저녁에서야 알게 되었다. 난리도 그날 저녁에 일어났다. 사실 나와 통화할 때 아들은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지역의 큰 체육관에 축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택시를 함께 타고서. 위험한 점도 문제지만 착실했던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놀러’ 갔다고 생각하니 화가 난 내가 문제였다.

학원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아들을 이해해주지 못했다. 단 한번, 처음 해 본 일탈이었는데도 나는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화를 냈었다. 그때의 판단 기준으로는 ‘다른 아이도 아니고 이렇게 착실하던 아이가 거짓말까지 하고, 그것도 놀러 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뉘우쳤다. 유치원 시절 우산 사건 이후로 크게 다짐해 놓고도 결국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부모로서 내 사고를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에게도 신신당부하며 첫째에 대해 느긋해지자고 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수시로 일어날 수 있는 별일 아닌 일들을 지혜롭게 넘길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 무렵 시작된 것이 ‘부모교육’이었다. 그때 아이가 다니던 학교에서 부모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프로그램에 신청하지 않았다면, 부모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우리는 부모교육을 통해 듣고 기다리는 연습을 했다. 물론 지금도 실수를 하지만 배우는 부모가 되기로 한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한편, 둘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와 둘째는 출생 연도로 따져 네 살 차이가 난다. 그런데 첫째가 일곱 살에 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학년으로는 다섯 학년 차가 난다. 그런데 이 둘은 어릴 때부터 참으로 달랐다. 둘 이상의 아이를 길러본 부모들은 모두 이해하고 느꼈으리라. 여럿을 키워도 어쩌면 그리 제각각 성향이 아주 다를 수가 있는지를.

내 둘째는 딸이다. 그런데 왠지 모가 난 아들을 키우는 것 같았다. 내 근무 지역과 돌봄이 필요한 가족 등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두 아이 모두 돌이 지난 후 일 년 정도를 나의 부모님이 돌봐주셨다. 그런데 둘째가 완전히 나의 양육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 날 부모님이 말씀하셨다.

“네 아들을 동시에 다섯을 키우라 했어도 이 딸 하나 키우는 것보다는 더 쉬웠을 것 같았다. 에너지도 많고 남다른 마음도 가졌으니까 잘 살펴 가면서 키워라. 잘 키워라.”

하시며 당부하셨다. 그 말씀 속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둘을 함께 공원에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그날은 딸이 처음으로 야외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녀 본 날이다. 작은 공원에서 미끄럼틀을 본 딸이 달려가 미끄럼틀 내려오는 부분을 거꾸로 잡고 올라갔다. 공원에는 우리 가족 넷만 있어서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깜짝 놀랐다. 그런 대담한 행동에 놀란 것은 엄마 아빠인 우리보다 오빠인 첫째였다. 딸의 나이로 치면 세 살 때였을까? 그럼 네 살 위인 아들은 일곱 살이었다. 그때까지  

“위험하니까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면 안 돼.”

라는 말을 포함하여 규칙과 약속이라는 것은 꼭 지켜오던 오빠로서는 둘째의 이 창의적인 행동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일화로 치면 더 다양하고 재미난 일들이 많다. 내 아들과 딸은 이렇게 성향이 달랐으니 나와 남편의 양육방식도 달랐다. 그런데도 나는 그렇다는 사실마저 잘 몰랐다. 동생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말해주기 전까지는.          

주변의 조언은 이랬다.

“아들은 정해주는 대로, 교과서처럼 자라니까 부모의 잣대가 계속 높아지고 까다로워진다. 여유를 좀 가지고 길러라. 지금도 충분히 모범적이다.”

“딸이 밝고 명랑하니까 뭐든 다 허용해 주는 부모가 되는 것 같다. 되고 안 되는 경계를 정확하게 정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 말을 들은 것도 아들의 축구장 사건이 있던 즈음이었던 같다.

첫째가 뭐든지 잘 해내야겠다는 힘든 마음을 갖고 있었던 이유는 잘!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부모가 있어서였다. 반면 둘째가 뭐든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던 이유 뒤에는 무조건 허용하고 지지해 주는 부모가 있어서였다. 두 아이의 부모는 분명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첫째는 옥죄어 힘들게 사육하고, 둘째는 느슨하게 방목하게 할 뻔했다. 정말 당시의 ‘부모교육’은 우리가 부모로서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그 후 이만큼이나마 바뀌게 된 고마운 계기가 되었다.    


       

학년말에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한다면 부모는 어떤 마음으로 전화를 받을까? 나는 아들의 선생님으로부터 한 번, 딸의 선생님으로부터 한 번 이렇게 두 번의 전화를 받았다.

담임선생님의 번호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긴장이 되었다. 내가 교사의 입장이라 그동안 담임선생님께 부담이 될까 봐 가능한 드러나지 않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해 왔고 그런 이유로 상담 전화도 최소화했다. 공개수업이나 학예회 등 학교에서 실시하는 각종 행사에도 좀처럼 참석하지 않으려 했었다. 이 생각과 방법이 맞다는 것이 아니지만 당시의 나는 그렇게 지냈다. 상담주간에도 얼마나 애쓰시는 줄 알기에 상담을 미루었다. 필요할 때, 선생님이 편하실 때 전화를 주시라고만 하고 일 년을 보내기도 해서 학년이 끝나는 시기에 전화를 하셨다고 했다.          

막상 전화 수신자가 되고보니 교사인 나도 당황스러웠다. 사실 크고 작은 궁금증이나 잠깐 지났던 아쉬움 등을 담아두고 있던 참이었는데 오히려 선생님은 두 분 모두 그 지점에 대해 아주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다. 예를 들어가며 아이들의 일 년 생활을 알려주시고, 통지표에 다 쓰지 못했던 다양한 일들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더 큰 발전을 위해 이렇게 해보시라, 저런 방법이 좋을 것 같다고 알려주시기도 했다.

“담임으로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는데도 문의나 민원전화 한번 없이 믿고 보내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2월도 저물어가던 때 전해주신 선생님의 말씀은 잊을 수 없는 울림주었다.



정말로 학년말 통화를 하고픈 보호자가 가끔 있다. 아이의 성향은 부모의 양육방식에 의해 형성되며 부모를 반영한다고 믿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객관적인 공간에서 생활하고 느낀 점을 알리고 허심탄회하게 대화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역시 뜨거운 감자를 앞에 둔 상황은 어렵다. 그래서 실행에 옮긴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내가 전화를 받을 때 그러했듯 역시 당황한 기색이다. 그래도 처음의 목적대로 아이의 중요한 성향을 어떻게 발전시켜 줄 수 있는지 소신껏 말씀드리고 아이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처음 전화를 받을 때 의아해하던 보호자들도 전화를 끊을 때는 진심으로 고마워하셨다. 그래서인지 이들 대부분과는 그 해가 지나고도 오래도록 연락을 주고받는 편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과 뜨거운 보호자들이 함께 있는 학교 현장이기에 앞으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다. 몹시 힘이 빠지고 어려운 시기 2023년을 보내며 어느 해보다 많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그리고 동료 선생님들에 대해 깊게 알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존경하게 된 해였다. 그러던 중 알게 된 어떤 선생님이 학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과 비슷하다고 했다. 여전히 비슷한 상황이 생기는 현장에서 안타깝고 씁쓸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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