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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Apr 26. 2024

부모교육을 함께 받은 부모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십사 년째 쭉 만나고 있는 여덟 가족 모임이 있다. 남매, 친척 계모임도 아니고 같은 직장의 사람들이나 동호회, 동아리 취미활동으로 만난 사이도 아닌데 오래도록 만나오고 있다. 처음 그 모임이 시작될 때 유치원에 다니던 딸은 지금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우리 모임은 부모교육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새로 형성된 아파트 단지에 신설 학교가 생겼고 열성에 찬 학부모와 학생들이 있었다. 교육과정 설명회가 열리는 날에는 강당에 발을 디디기 힘들 정도였고 당시로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런 뜨거운 개교 학교에 첫째가 4학년으로, 둘째는 유치원으로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가져온 안내장을 내밀었다. ‘부모교육’을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읽어보니 초청 강사로부터 듣는 1회성 공개 강연 방식이 아니었다. 4개의 주제가 제시되었고 각 주제당 4회로 운영되며 게다가 부모 두 명이 모두 참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희망하는 주제에 체크한 후 제출하라는데 하나같이 훌륭한 주제들이라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계획서만 보고 있는데도 앞으로 달라질 것 같은 우리 가족의 분위기를 상상하며 벌써부터 으쓱했다가 든든해졌다 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청 좋은 주제로 부모교육을 하는데 어떤 주제에 참석할까? 같이 골라보자, 스케줄은 어떤지 확인해 보자 해가며 물었다. 여기에 복병이 있었다. 회식을 즐기고는 한껏 기분 좋게 상기된 상태도 들어와 내 설명을 들은 남편은 그저 좋은 주제와 취지라며 함께 하자 했다. 분명.

목적도 좋고 아이들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무엇보다 부모교육을 받을 기회도 따로 없지 않겠냐며 이번 기회에 잘 받아보자 했다. 별 고민도 하지 않았고 세부적인 교육계획 등을 살펴보지 않은 채 시원하게 서명도 했다. 



드디어 첫 교육이 시작된 날에서야 남편은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선택한 주제에 따라 장장 열몇 번이나 부부동반으로 참석해야 하는 부모교육에 서명한 것임을 깨달았다. 사실 그런 상황임을 알고 반응 또한 예상했지만 나는 살짝 모른 척 얼버무리며 학교에 들어섰다. 남편은 도저히 그 회수만큼의 참석은 불가능하다며 선택한 주제를 줄여서 교육받을 수 있는지 양해를 구하자고 했다. 강의가 이루어질 교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가 여기에 웬일인가?” 

하며 어리둥절한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었다. 남편이 직장에서 ‘좋은 형님’으로 생각하고 평소에도 잘 지내오던 분이 그 교실에 먼저 와 계셨던 것이다. 두 아빠는 서로 사실에 깜짝 놀라며 기쁘게 당황했다. 

절대 두 주제 이상은 참석하기 어렵다. 다음 주제부터는 참석하기 어려우니 부모 동반인 조건이든 회기든 조정하거나 양해를 구해야 한다고 했던 두 남편들은 그 인사의 순간을 통해 스스로 건의 의사를 철회했다. 오히려 더 열심히 교육받아보자며 의기투합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덟 가족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어느 한쪽은 모르쇠나 얼렁뚱땅 설명하여 부추긴 배우자의 말을 듣고 온 모양새였다. 엄마의 적극적인 성화에 못 이겨 아빠들이 동의하였고 일단 시작해 본 후 다른 주제의 교육을 받을 것인지 결정하기로 합의를 보기도 했단다. 각 가정의 이런 일방적인 합의 덕분! 에 우리들은 아직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부모교육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도록 훌륭했다. 강연 방식이 아니라 집단 토론과 상담에 가까워서 교육효과가 더 좋았다. 각 주제별로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다른 가족의 사례를 통해 다양한 해법을 찾기도 했다. 바람직한 방향을 함께 설정해 보고 실천을 다짐할 때도 있었다. 비록 모든 가정에서, 부부 모두 참여하여 모든 주제의 교육을 이수하자는 약속으로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모두 마지막 주제의 교육까지 함께 마무리했다. 그리고 교육이 마무리되고 나서도 십사 년째 계속 만나오고 있다. 

우리의 가족 모임은 교육적인 의도로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실천했다. 특히 부모 직업 체험 활동이 의미 있었고 오래도록 우리 대화의 중심 주제로 남아있다. 강사님을 포함한 여덟 가족 16명 어른들의 직업이 아주 다양한 점에 착안하여 진행한 프로그램이었다. 아이들이 무척 적극적이고 즐거운 체험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장소도 특별했다.

부모교육을 진행해 주신 강사님의 일터인 상담센터를 비롯하여 대학 강의실과 실험실에서부터 병원 진료실, 공장의 생산설비와 경찰서, 농장과 서점 등 다양한 장소와 직업을 ‘체험’해보았다. 



아이들이 주로 초등학생일 때라 동물을 무척 좋아했는데 수의사가 하는 일에 대해 기대가 높았다. 보통의 동물병원이나 애견 샵에서 흔하게 보았을 개와 고양이 등 자그마한 반려동물에 대한 체험을 예상했고 아마 그런 체험도 즐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대동물인 소, 돼지 등의 질병을 관리하고 출산을 돕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농장에 방문했을 때 가축들의 크기와 냄새에 놀라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지해졌고 신기해했다. 우유, 유산균 음료들이 만들어지는 설비를 살펴보고 시음도 하면서 아이들의 눈은 어느 때보다 빛났다. 일반적인 수의학의 범위에서 벗어나 대동물의 세계를 체험해 본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치과로 체험 갔던 날은 아이들이 어느 때보다 정직하고 투명했다. 예상대로 치과에 들어서자마자 자동 반사처럼 실제로 치과치료를 받는 때의 두려움을 보였다. 충치 치료를 진짜 받게 될까 봐 양치 교육에도 매우 진지했다. 열심히 연습한 후에는 맞는지 입을 크게 벌려 확인까지 받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래도 실제 진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인지 금세 치과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갔다. 작은 치경을 보고도 그날은 기겁하지 않았다. 동그랗고 작은데도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게 신기하고 귀엽다며 친근하게 만져보고 살펴보았다. 아이들은 변화하여 치과를 나왔다.

대학 체험에서는 아이들의 진로를 엿볼 수 있던 기억도 있었다. 공학계열의 전공에 대해 설명을 듣고 각종 장비와 측량기기 등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특히 첨단 측량 기기들도 있어 사용 방법을 체험해 본 실험실에서 이과의 성향이 두드러진 아이들이 드러났다. 적극적으로 측량기기의 생김새, 부품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눈을 맞추어 살펴보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크기 등에 놀라고 설명을 들으면서도 직접 작동해 보는 등의 체험에는 관심이 낮은 아이들로 나뉘었다. 

“강의실, 실험실은 공부를 하는 공간이라 그런지 애들이 굳어 보여요.” 

“우리 애들은 다들 문과 체질인가 봐요. 표정은 진지해 보이는데 질문이 줄었네요.”

하며 솔직하고 투명한 아이들을 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는 광고물과 간판 제작에도 참여했다. 가정마다 원목 문패를 만들고 가족사진을 바탕으로 하여 시계도 제작해 보았다. 가족 모두가 참여하여 직접 만든 딱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애장품이 생긴 것이다. 먼저 문패는 원목에 각 가정의 가훈이나 좋은 메시지를 쓰고 문양도 넣어 디자인했다. 음각, 양각의 효과를 내는 샌딩 작업을 거쳤는데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래의 강력한 힘이 신기했다. 가족 모두 집중하며 새겨져 나온 글자와 그림에 색을 더해 문패를 완성했다. 전면에 가족사진을 바탕으로 하여 시계도 만들었다. 아이들은 사진도 시계 부품들도 꼼꼼히 살펴가며 하나밖에 없는 벽시계에 환호했다. 우리들 모두의 집에는 아직도 이때 만든 재산목록들이 있다.

과자 공장의 생산과정을 체험할 때는 모든 과정을 만끽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주 순수하게 드러났다. 다른 생산품이라 해도 신기했을 텐데 게다가 좋아하는 과자의 생산과정이니 얼마나 취향 맞춤형이었던가. 재료 단계부터 과자 모양이 만들어지고 분류되어 상자에 담겨서 눈앞에 올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생산설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마트에서 사 먹었던 과자의 생산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말 그대로 따끈따끈한 신상품 과자를 맛보았다. 어른들도 평소 마트에서 사 먹던 것과는 맛이 다르다며 입을 모았던 것이 기억난다. 

서점 체험에서는 책이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과 분류작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서점은 평소 책을 사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소비자에게 오기까지 알 수 없던 업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해당 체험일에 부모님들은 아이들마다 학년에 맞추어 주제별로 다양하게 책을 준비해 두셨다. 도서관이나 일반 서점과는 다른 대형 창고형 서점에서 특별한 독서의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은 이 책을 마음껏 읽었고 헤어질 때는 모두 그 책을 선물로 받으며 감사해했다. 

경찰서 체험도 있었다. 영화 ‘실미도’에서 중요한 문건을 넣어놓았을 법한 회색의 철제 캐비닛이 쭉 놓인 경찰서 사무실의 분위기에 아이들은 압도되었다. 수갑을 채우거나 포승줄을 직접 묶어볼 때는 흥미진진했던 아이들이 유치장 앞에서 굳기 시작했다. 유치장 창살 내부로 들어가 보고 순찰차 뒷자리에도 앉아 보며 진지하다 못해 표정은 어두워지고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크고 작은 자기의 잘못을 사해주기를 바라는 듯 반성적 질문이 넘쳐나고 정의감도 불타올랐다. 그리고는 절대 죄를 짓지 않겠다 다짐했다.



우리는 직업 체험뿐만 아니라 철마다 지역마다 특성을 고려하여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사도 추진했다. 전·현직 유치원, 초등교사가 직업적 특성을 발휘한 면도 있고 그보다 더 실천력 뛰어난 엄마들의 활약 또한 대단했다.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서른두 명이나 되는 수가 참여하면 우리의 행사는 꽤 떠들썩한 행사가 되었다. 어떤 계절에는 래프팅과 미션 수행이 있는 캠핑을 갔다. 해수욕장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보물 찾기를 하는 등 무엇을 하든 팀을 나누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숲 체험과 서바이벌을 체험했다. 막내 그룹의 유치원 아이들도 마치 유격훈련을 하듯 나무들 사이의 공중 그물망을 걷거나 집라인을 타며 모험심을 키웠다. 어떤 때에는 친환경 생태체험마을에서 우렁농법 등 농사법에 대해 알아보고 친환경 음식을 먹으며 환경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피자 체험과 영화 관람 등 우리 여덟 가족은 아이들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부모교육 프로그램으로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중 각종 심리 검사도 있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MBTI가 대중화되기 이전이라 대개는 검사용으로 실시하던 때였는데 우리 구성원들 모두 검사를 하고 결과에 대해 대화했다. 그 검사는 재미를 넘어선 목표가 있었다. 아이들을 양육하거나 대화할 때 더 좋은 부모와 어른이 되기 위한 노력이었다. MBTI 결과에 맞는 대화 방법, 놀이 방식 등을 찾기 위해 논의하고 연습해 보며 우리는 좀 더 성숙하고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 성장은 어른들에게 내 자녀들, 다른 아이들을 이해하고 잘 돌보는 데 매우 큰 변곡점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중요한 방향이 되었다. 나이와 직업뿐만 아니라 성향도 종교도 자라온 환경도 달랐지만 모두 노력하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른들은 어느 아이에 대해서든, 어느 상황에서든 이끌어주고 보호해 주고 도와주었다. 서로 존중하며 모두의 부모로, 다 같이 든든한 어른으로 함께 했다. 소중하게 성장해 온 시간이 벌써 십사 년을 보내며 어렸던 아이들도 막내팀 두 명까지도 의젓한 성인이 되었다. 모두 잘 지내고 잘 자라준 것이 고맙기만 하다.



이 만남을 지속해 오면서 나는 주변에 이렇게 긴 호흡이 가능한 만남을 추천한다. 가족 구성원 전체가 함께하는 정규모임을 일정한 간격으로 오래 지속해 오는 것은 가정교육, 학교 교육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무엇보다 부모를 포함하여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성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학교나 기관에서 추진하는 부모교육이 아니라도 가능할 것이다. 나 또한 지금의 미성숙 단계보다 더 미개한 부모였을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부디 부모들이 미디어나 책을 통해 다른 가족의 케이스를 '시청'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족들이여! 부디 밖으로 나가고 직접 해보라. 이 모든 것을 함께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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