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까지 강원도 산불 이재민들(동해 지역)에 대한 초기 정신 건강과 심리사회적 지원(MHPSS)이 일단락이 되었습니다.2) 꾸준하게 정기적으로 다녀오니 이재민분들의 변화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의 경주 지진, 경기 북동부에서 난민 커뮤니티 내 단기간 코로나 감염 확산 대응, 국외에서의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 캠프, 이번 산불 이후 지원까지 일회성이 아닌 어느 정도 유의미한 기간 동안 지속적인 심리사회적 지원 활동을 떠올리며, 한 순간 재난의 피해자였던 분들이 경험하는 변화의 증언자로서, 그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촉진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물론 이에 대해, IASC(Inter-Agency Standing Committee)의 다층적 지원 체계의 피라미드를3) 통해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 이는 추후 정리 & 평가의 시간 이후에 보다 자세하게 다뤄보려고 합니다 - 이러한 체계적 지원의 틀이 현장에서 충분하게 적용되거나 이루어지지 못한 그 공백 사이사이를 채워주는 무엇인가가 가장 중요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큰 틀에서의 조정과 지원에서 그리 체계적이지는 않은 듯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임시 거주로 계시는 수련원에서 전체 조정을 담당해야 할 시에서 나온 공무원분들은 매일매일 바뀌고 새로운 분들이 오면서 전체적인 상황 파악이 거의 불가능한 듯하고, 구호 물품으로 받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1차적인 구호 물품이기에 개별적인 필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듯합니다. 또한 재난 발생 초기에 재난 경험자 대상으로 심리적 어려움을 완화시켜 재난 이전의 일상생활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지역의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의 경우 역시 상황실 내에 있지만 모든 사람이 오며가며 볼 수 있는 그런 곳에 위치하여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사이를 채워준 것은 다름 아닌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필요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 그야말로 기본적인 안전과 생활을 위한 물리적인 필요(자신의 발 사이즈에 맞는 신발, 손톱깎기, 보행기 등과 같은 것의 제공)에 더불어 각자의 경험이 이야기될 수 있고, 이해받는다는 심리적인 필요에 이르기까지 개별적 응답과 관계와 연결감의 형성.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시간과 정서적인 교류가 기본이 되고, 특히나 이번에는 대피소가 아닌 개인/가족 단위로 배정된 방에 계셨기 때문에 개인적인 사생활 공간의 확보가 가능한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형성하기에는 더욱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대규모의 재난 그리고 극 초기 단계, 도시에서의 재난과는 상황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어 로힝야 난민 캠프에서와 같이 대량으로 난민이 유입되는 상황이라면 과연 가능할까라는 질문도 해보게 됩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정말로 생존과 안전의 이슈가 중요한 상황이고, 자원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이겠죠.
그럼에도 분명 어느 시점에서든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개별적인 정서적 만남과 충족, 그리고 변화에 대한 증언일 것입니다. 지역사회 기반 정신건강 및 심리사회적 지원(CB-MHPSS) 프로그램에서 만난 로힝야 캠프에서의 아동들이 끊임없이 ‘내 이름은 뭐야?’라고 물으며 개별적 정서적 존재로서의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이 묻어나는 듯한 질문이나, 학교 수업 사이사이 제가 있던 공간으로 와서 특별한 활동이 없더라도 그림을 그리며 무엇인가 개별적인 만남을 가지고 싶어 하던 모습들이 아직까지 상징적 장면들로 기억에 남습니다. 이번 강원도에서 만난 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방 소도시 그것도 도심에서부터 들어간 곳에서 난 화재이기에 연로하신 분들이 많았는데, 일회적이 아닌 정기적으로 오며 가며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스크를 쓰고 만났음에도 줄곧 와주어서 감사하다며, 조끼 없이도 (일회적으로 오며 가는 얼굴이 아닌) 개별화된 얼굴을 알아봐 주시는 모습이 참 기억에 남았습니다. 특히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작별인사를 나눌 때에는 처음 때보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나아졌다는 변화의 경험과 함께 아무것도 주지 못한 마음, 다음번에 또 오게 되면 맛있는 것을 주겠다며 아쉬움을 전하는 마음에, 물론 미안함과 감사의 표현을 하시기 위함이지만 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어주시는 모습에 회복으로 가는 변화의 또 다른 단계도 짐작해보게 됩니다.
한 달여의 초기 단계에서의 지원을 마무리하며 늘상 강조하지만 자주 잊고 놓치게 되는 한 가지를 다시금 확인하며 마무리하려 합니다.
심리적 응급 처치(PFA)를 비롯 어떠한 심리사회적 지원에서든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할 하나는 바로 마무리인 듯 합니다. 마무리로서 무엇을 해야 하나 할 때 떠오르는 것은 1차적으로 개입 이후 피해를 입은 지역과 당사자들의 회복을 위한 지역사회 내에서의 자체적인 지속과 연계 노력도 있겠지만, 지원에 참여하였던 인력들의 소진을 막고,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관차원의 셀프 케어와 팀케어에 대한 정책과 실천에 대한 고려도 해당될 것입니다.
이번 강원도 산불 현장 지원 동안, 줄곧 ‘긴급 상태’를 유지하며 지원하고 있던 스태프들의 피로도와 - 저 역시 마지막 수요일에 다녀오면서는 피로감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이에 대한 돌봄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정기적으로 디브리핑을 하며 상태를 체크하면 좋겠지만 지원 기간이 길어지고, 이 활동 이외에도 산적한 과제들 앞에서, ‘지금 어떠한지’ 간단하게라도 물어보는 이 자체도 실제로는 쉽지 않은 듯 합니다. 인간(특히 타인)과 가치를 중심에 두고 활동하는 소셜섹터에 계시는 많은 분들에게는 자신이 현재 어떠한지를 묻는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사치스럽거나 편치 않는 질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마치 해외봉사단이나 NGO봉사단에서 ‘봉사’라는 단어가 주는 기본적인 무게로 인해 자신의 상태에 대해 묻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부담감이 있을 수 있듯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현실은 변화되어야 하고, 자신과 팀원들의 상태에 대한 체크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게 되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기존에 있는 평가와 같은 공식적 시간을 활용해서라도 형식적이지 않고 꼼꼼하게 스태프의 개별적 경험과 돌봄에 대한 필요가 이야기되고 잘 수렴되는 과정이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장에서 만나는 당사자들에게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개별적 정서적 만남과 필요에 대한 응답이듯이, 변화와 그 환경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축인 스태프 역시 스스로가 끊임없이 그러한 충족의 경험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가치를 움직이고 나아가게 하는 것의 바탕은 결국 정서와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 "정신건강 및 심리사회적 지원"(Mental Health and Psychosocial Support)이라는 복합 용어는 2007년부터 "심리 사회적 복지를 보호 또는 촉진하고/또는 정신 장애를 예방 또는 치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유형의 지역 또는 외부 지원"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IOM, 2021) ; “정신건강 및 심리사회적 지원”이라는 합성어는 최대한 다양한 집단의 관계자를 포함하며,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는 데 있어 다양하고 상호보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IASC, 2007)
2) 국제개발구호단체 더프라미스는 3월 초부터 5주간 동해안 산불 지역 중 하나인 동해 망상 수련원 임시대피소에서 정신건강과 심리사회적 지원 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필자는 국제재난심리지원단 이지스 재난심리지원 전문 활동가로서 주 1회 매주 수요일 현장을 오가며 이재민들을 위한 심리사회적 지원 활동을 하였습니다.
3) 재난 시 정신건강 및 심리사회적 지원에 관한 개입 피라미드 (IASC, 2007) (피라미드 하단 -> 상단 : 기본 서비스 및 치안, 지역사회 및 가족 지원, 집중적 비전문 지원, 전문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