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어라이프,
좋은 루틴만이 살 길이다!

슬기로운 어른생활 -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by 조선희
배너의 사진들은 내가 루틴으로 찍고 있는 미로헌 주변 하늘이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아침부터 살롱은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34~5도는 예사다. 동향의 대형 창으로 쏟아지는 태양열이 실내를 지글지글 달군다.

그 열기가 주계단을 타고 1층 주방까지 내려오는 것 같아, 비누와 나는 누구랄 것도 없이 아침이면 살롱 에어컨을 켠다. 낮에 살롱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일정 온도로 맞춰 계속 켜둔다. 반대로 에어컨을 끄는 사람은 2층 거주자인 수와 루나다. 비누나 내가 허겁지겁 올라가 끄지 않아도 된다.

그게 우리의 루틴이다.


생판 남과의 동거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건 우연이 아니라 습관이다. 처음엔 우연히 만나, 가치관이 맞아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셰어라이프는 결국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다. 낭만은 짧고 일상은 길다. 루틴은 반복되는 실천에서 비롯된 ‘생활의 문법’이자, 우리 사이의 불문율이다. 좋은 루틴은 갈등을 줄이고 자율성을 지켜주고 예측 가능한 안정감을 준다. ‘관계의 쿠션’이라고나 할까.


아침과 점심 사이, 마루가 운동을 가지 않는 날은 살롱은 ‘카페’가 된다.

“누나, 커피?”

한마디면 된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나는 언제나 마루의 단골손님이다. 테이블 위에 저울, 온도계, 드립포트 등속이 펼쳐지고, 의식을 치르는 사제처럼 마루의 경건하고도 즐거운 커피 만들기가 시작된다.


2층 청소를 하는 주말이면, 단체대화방에 메시지가 올라온다.

“청소기 돌려요. 좀 시끄러울 수 있어요.”

이제는 익숙해진 루틴이지만, 주말 아침의 소음에 양해를 구하는 수나 루나의 배려가 담긴 메시지다. 어떤 날은 일정에 쫓겨 밤늦게 청소를 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도 메시지는 빠지지 않는다.

“죄송해요. 어쩔 수 없이 늦은 밤 청소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루틴은 꽤 다양하다. 공동 창고 정리 주기, 회의 일정, 가사 분담처럼 생활 속 규칙들이 쌓이며 하나씩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것이 공유 주방 사용 시간. 아침 8시 이전과 밤 9시 이후는 ‘조용히 사용하는 타임’으로 자연스럽게 정착되었다. 이 시간대에 조용히 사용해야 하는 건 또 있다. 대문과 현관문. 워낙 사이즈가 커서, 신경 쓰지 않으면 쾅 닫히는 소리가 여간 크지 않기 때문이다.


셰어라이프는 관계의 기술이자, 삶의 리듬이다. 좋은 루틴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좋은 루틴은 ‘자율과 배려’의 균형 위에서만 만들어진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서로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살기 위해 만든 약속. 강요 없이, 타인의 리듬을 고려하며, 느슨하지만 자주 반복되는 루틴이 ‘좋은 루틴’이다. 그런 루틴이 있기에 누군가 잠시 빠져도 미로헌이라는 시스템은 무리 없이 돌아간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루틴을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관계의 기술’이라 말하고 싶다.


공동 루틴은 결국 개인 루틴 위에 세워진다. 미로헌에서는 각자의 리듬이 전체 분위기를 만든다. 스스로를 잘 관리하는 루틴은 셰어라이프에 기여하는 가장 큰 자산이다.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루틴을 성실히 챙기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신뢰를 얻게 된다.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민폐를 끼칠 확률이 낮고, 타인을 배려할 여유는 더 많기 때문이다.


이건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나도 미로헌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꾸준히 지켜온 개인 루틴이 있다. 오름 오르기와 아코디언 연주. 이전 같으면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일들이다. 오름 오르기는 길고도 지루했던 암 투병의 기본 루틴이었다. 미로헌이라는 안전망에 안착했다는 안도감은 컸지만, 그만큼 다른 미로허니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겠다는 책임감에서 시작했다. 물론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일이 생기면 뒤로 미루기 일쑤지만, 오름 오르기 루틴은 나의 심신 회복력의 원천이다.


아코디언 연주는 오랫동안 품고 있던 나의 로망이었다. 수술한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아코디언을 껴안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지체 없이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무도 없을 때 연습하지만, 언젠가는 살롱에서 비누는 기타를 치고, 나는 아코디언을 켜며 자그마한 콘서트를 여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다.


생판 남과 산다는 건 ‘특별한 날’을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
하루하루 일상을 무탈하게 통과하는 일이다.
좋은 루틴은 그 일상을 지탱하는 뼈대 같은 것.
셰어라이프의 성패는 그 뼈대를 얼마나 정성스레 가꾸느냐에 달렸다.
일상 속 마찰이나 갈등을 해결해 주는 건, 엄격한 규율보다
‘예측 가능한’ 루틴일 때가 많다. 그래서 셰어라이프는 좋은 루틴의 집합이며,
좋은 루틴은 곧 우리가 나누는 일상의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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