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는 천.천.히.

by 조선희

미로헌 초기에 몇 시간 동안 차고 문이 열려 있었던 적이 있다. 누군가 차만 빼고 차고 문을 내리지 않은 채 출발한 적이 한 번, 또 한 번은 누군가 차를 들인 뒤 문이 닫혔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들어온 경우였다. 다행히도 밤 시간대는 아니었지만 차고는 마당으로 통하는 사실상 또 하나의 대문인지라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실수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아무리 급해도, 차고 문 닫히는 걸 끝까지 확인하자고 다짐했다. 시간에 쫓겨도 예외는 없다고.


한 번은 내가 달걀을 삶다가 큰일을 낼 뻔했다. 인덕션에 냄비를 올려둔 채 방에 들어와 원고를 쓰고 있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딘가에서 카스텔라 굽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비누가 달걀빵을 굽나? 맛있겠군.’ 입맛을 다시다가— 아차, 내 달걀! 쏜살같이 뛰쳐나가 보니 주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냄비 밑의 실리콘 깔개는 눌어붙었고, 냄비 안의 달걀들은 이미 초토화. 그나마 인덕션이었으니 망정이지, 가스레인지였으면 대참사였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타이머 추종자가 되었다. 달걀 8개 완숙은 세기 13번에 14분. 시행착오 끝에 얻은 내 인생 최초의 ‘삶은 달걀 레시피’다. 주방에서 다른 일을 할 때에도 인덕션 위에 뭔가 올려두었다면 반드시 타이머를 켠다. 실수는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늘 속도전이었다. 신문기자 시절에는 ‘특종은 못 해도 낙종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엔 하루하루가 전쟁통 같았다. 아침마다 아이들을 떼어놓고 뛰어가던 출근길을 떠올리면, 지금도 숨이 가빠온다. 직업을 바꾼 뒤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루 스물네 시간은 언제나 모자랐다.


제주에 온 뒤에도 나는 여전히 시간에 허덕였다. 남들은 도시의 분주함을 벗어던지고 여유를 찾아 소도시나 농촌으로 이주한다지만, 나는 제주섬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역대급 일의 쓰나미를 감당해야 했다. 감귤농사는 물론 농사 자체가 생전 처음인 데다 농촌살이도 처음이었으니, 모든 것을 걸음마부터 다시 배우는 꼴이었다. 농사에 방송일, 직장생활까지 겹치니 늘 일은 산더미였다. 요즘 시쳇말로 ‘말모(말해서 뭐 해)’였다.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던 시절을 오래 겪어서일까. 아직도 나는 늘 분주하다. 평생 속도전 속에 살아온 습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다. 속도뿐이랴. 한 번에 단 한 가지 일만 해본 적 없을 정도로 나는 철저한 ‘멀티 플레이어’였다. 나이까지 보태지고 보니 요즘의 덤벙거림은 다 젊은 시절부터 쌓인 습관의 결과인 듯하다.


이제는, 정말로 속도를 늦춰야 할 때가 왔다. 세월의 체감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더니, 요즘 나는 시속 60km로 살고 있다. 머지않아 일반도로 제한속도를 찍게 되겠지. 그러니 지금 당장, 내 삶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 천천히,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자. 이 나이에 ‘멀티태스킹’ 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특히 집을 나설 때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차 키와 경비카드가 달린 열쇠꾸러미는 가방에 넣었는지, 핸드폰과 지갑은 챙겼는지, 불은 껐는지, 현관의 인형은 돌렸는지(현관 앞 다섯인형의 비밀), 문은 잘 잠갔는지, 대문 경비는 걸었는지, 차고 문은 내려졌는지 빙 둘러 하나씩 눈길을 주며 확인한다. 이 중 하나라도 빼먹으면 낭패를 넘어 민폐다. 그러려면 출발 시각보다 훨씬 전에 외출 준비를 마쳐야 한다. 회의나 워크숍이 있는 날엔 자료며 노트북을 전날 밤 미리 챙겨두는 것도 요새 생긴 습관의 하나다.


다짐을 했건만 마음대로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엇보다 집을 나서는 순간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말아야 한다. 전화받으면서, 대문 잠그고, 운전하는 것이 가능했던 예전의 나로 착각하면 안 된다. 그런 착각에 빠져 집을 나섰다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선 순간 문득 불안이 밀려온다. ‘차고 문은 내렸나? 경비는 잘 걸었나?’ 차를 돌려 다시 집 앞으로 돌아가 확인하기를 몇 차례. 이건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비밀이다.


그렇다고 슬퍼하거나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이제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이젠 그래도 될 나이니까.
아니 그래야 할 나이니까.
이제야 비로소, 나는 삶의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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