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주방에 나가니 마루는 급히 외출할 채비를 하고 있고, 수는 그에게 잠깐 이야기할 게 있다며 시간을 내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인데? 급한 거야?”
“사람 얘기요. 급하진 않고요.”
“그래? 그런 이야기라면 써니랑 먼저 나눠. 난 다녀와서 들을게.”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루가 나가고, 엉겁결에 수와 나는 주방 아일랜드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제주에 내려온 지 어느덧 4년째. 생면부지의 섬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며 지내다 보니, 어찌 쌓인 이야기가 없을까. 잘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어도 ‘내가 외지인이라서 그렇겠지’ 하고 넘기곤 했는데, 그런 순간이 몇 번 되풀이되자 문득 의문이 든다고 했다. 이게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 뭔가 ‘꼬임’이 감지되는데 이를 덮어두는 게 좋을까? 아님 정색을 하고 바로잡아야 할까?
“상대와 경쟁 관계야?”
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딱히 경쟁 상대는 아니예요.”
“그래? 경쟁자는 아닌데, 또 아군도 아닌 사이라면 항상적 우호를 기대하는 건 무리 아닐까?”
“그건 나도 알아요. 그런데 사안이나 상황에 따라 감정의 온도 차가 너무 커요. 그게 힘들어요.”
“그거, 내가 말하는 '감태병(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녹색 신고!')'이네. "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진짜 어렵지. 가끔 우리가 농반 진반으로 하는 말 있잖아.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말...”
물론 대화를 한다고 해서 내가 뾰쪽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로는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 가서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외지인이라서 그렇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조심스러운데 누굴 만나서 켜켜이 쌓인 속내를 털어놓을 것인가.
이럴 때 우리는 참으로 서로에게 유용하다. 누군가 “대화가 필요하다”라고 단체대화방에 올리면, 우리는 기꺼이 시간을 내서 들어주고, 토론하고, 제안하고, 조언한다. 얼마 전에도 새로운 업사이클링 상품을 구상 중이던 수가 미로허니들에게 저녁에 잠시 모여달라고 요청했다. 선약이 있는 루나만 빼고 우리는 살롱에 모였다.
수가 고민 중인 지점을 설명하자,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비누가 몇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고, 마루는 마케팅 포인트를 세심하게 짚었다. 나는 예상 납품처의 성격에 따라 전략이 달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평소에도 수는 사업과 관련된 고민이 생기면 마루에게 의견을 구한다. 마루는 기업 경영 노하우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의 초기 창업 과정부터 곁에서 지켜봐 왔기에 시의적절한 조언이 가능하다. 비누 또한 두 사람의 오랜 ‘티키타카’를 지켜본 터라, 수가 막히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 원 포인트 어드바이스를 건넨다. 이번 경우만이 아니라 장르 불문, 창의적 아이디어가 필요할 땐 언제나 비누다.
나의 쓸모는 조금 다르다. ‘제주(사람ㆍ문화) + 행정/공공기관’이라는 범주 속에서 의문점이 생기거나, 곤란한 상황이 생길 때는 주로 나를 찾는다. 제주 정착 30년을 바라보는 만큼 내게는 나름 제주에 관한 꽤 두툼한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이 범주와 근사한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 루나가 비교적 자주 내게 조언을 구한다.
“혹시 ○○○라는 분, 잘 아세요?”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경우, 나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답을 제공해야 한다. 그 인물을 내가 잘 아느냐, 모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와 개인적 친분이 없더라도 그 인물이 관여하고 있는 일들이 제주도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아는 범위 내에서 설명한다. 이때 내 주관적인 판단과 객관적인 평가를 명확하게 구분 지어 조언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생판 남’ 사용설명서다.
사람이란 누구나,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는 법이다.
쓸모란 단지 기술이나 기능의 문제가 아니다. 조금 더 넓게 보면,
그것은 스스로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는 ‘의지’와 ‘태도’이다.
우리는 서로의 쓸모를 알아보고, 그 쓸모를 존중하며, 적절히 잘 사용한다.
서로에게 쓸모가 되어준다는 건 곧, 존재의 효능감을 확인하는 일이다.
자기 깜냥껏 쓸모를 발휘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일상 속에서,
생판 남남끼리의 셰어라이프는 더욱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