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오 작가 Nov 28. 2022

새벽 2시 50분에 온 편지에 답을 하는 것에 대해

젊은 심리학도에게 보내는 편지



*연락을 주고받지 않던 이가 조용히 모아둔 반가운 열매를 가득 열어 퍼뜨릴 때 누군가는 당혹감을, 그리고 나는 무방비로 기쁘다.      


선생님께

Y 선생님. 안녕하세요. D입니다.

새해가 밝았네요. 첫 주말 잘 보내셨는지요?

별 용건은 없고 너무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서 새해 인사를 빌미 삼아 안부 인사 전하고자 메일 드렸습니다.      

사실 실습 끝나고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었고, 보고 싶은 마음도 커서 여러 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못 가고 말았네요. 3월엔 코로나 좀 좋아지면 가야겠다 했는데, 6월이 되어도 10월이 되어도 좋아지지 않아 결국 이렇게 한 해가 흘러버렸네요.. 병원 상황도 좋지 않고 정신없으실 것 같아 안부인사조차 못 드렸고요.     


그래도 저번 K언니 결혼식 때 뵐 수 있어서 너무 반갑고 좋았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소리 지를 뻔했는데 체통을 지키느라 힘들었어요.      


선생님~ 제가 한 달 전에 풀 배터리 검사를 진행했었거든요. 선생님과 병동에서 지능검사 실시한 이후 첫 검사였고, 너무 오랜만에 하는 검사인 데다가 제가 한참 부족하다 보니 긴장되더라고요. 그런데 선생님 생각하니까 신기하게 긴장이 많이 풀렸어요.


안경 쓰고 옆에서 책 읽으시는 선생님 모습 상상하면서 혼자 마음속으로 웃으면서 기분 좋게 검사 준비하고 진행했어요. 검사지에 글자 쓸 때도 "다원이~ 이거 어떻게 알아보지~?" 하는 선생님 목소리가 들려서 꼬부랑꼬부랑 안 쓰려고 노력하게 되고, 반응 유도하는 행동이 될까 봐 고개도 안 끄덕이고 추임새도 안 넣으려고 노력하고, 채점도 '더하기' 잘했나 한번 더 체크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검사를 마치고 나니, 선생님이 얼마나 보고 싶던지요.....     


이거 말고도 그냥 문득문득,

벚꽃이 피면 벚꽃이 펴서 선생님 보고 싶고,

낙엽이 지면 낙엽이 져서 선생님 보고 싶고,

신경정신의학 책을 보면 스터디하던 생각나서 선생님 보고 싶고,

로샤 보면 냉철하게 설명해주시던 선생님 생각나서 (안경 쓰신) 선생님 보고 싶고(ㅎㅎㅎ),

혼자 바보 같은 실수 하면 '그래도 괜찮다 말해주시던' 선생님 모습 떠올라 선생님 보고 싶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정말 꽤 자주 'D는 잘 될 거야' 말해주시던 선생님 생각하면서 평범한 하루를 힘차게 살아가곤 했습니다.     


복학해서 실습을 갈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코로나 이전에) 선생님을 못 만났다면 어땠을까,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생각할 정도로 선생님처럼 좋으신 분을 만난 것에 감사하고, 함께 했던 시간들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제 마음에 너무 따듯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아마도 저라는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버틸 수 있는 영양분을 선생님께서 많이 공급해주신 것 같아 이렇게 또 감사하다는 인사 전해봅니다.      


선생님께서는 한 해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코로나 때문에 정신없고 여전히 검사는 많아서 바쁘게 지내셨을 것 같지만... 그런 와중에도 선생님께서 틈틈이 행복하셨다면 저도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메일이 점점 장문의 편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네요. 혹시.. 편지에서 제가 얼마나 선생님과 수다를 떨고 싶어 하는지 느껴지셨나요....? 느껴지셨다면, 선생님은 역시 전문가십니다..! 커피 한 잔 하면서 선생님과 수다 떨고 싶네요 ♥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고, 웃는 날이 가득한 새해 되시길 바랄게요.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D 올림 -


-------------------------------------               

D 선생에게  

    

편지 잘 받았어요.

정성스러운 편지에 자세를 가다듬고 답을 해야 할 것 같아, 시간을 가지고 지금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선 새해 소감에 대한 답을 하자면, 실상 하룻밤 잤다고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냐만은, 마음속에 새 출발, 새 희망이라는 글자와 함께, 기대하게 만드는 게 새해가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실습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을 그리 세세하게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걸 보니, 잘해주지 못한 것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당신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학생, 존재였습니다. 덕분에 나도 많이 배웠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방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나의 지난 한 해는 마음속 싸움의 연속이었지 싶습니다. 내 마음이 내 것 같지 않고, 내가 나를 홀대하는 것에 대해 마음 놓지 못하고 보낸 것 같아요. 누구나 앞을 향해 가기 바빠서, 눈앞의 즐거움에 빠져서, 그런저런 이유로 스스로에게 무례해지는 경우가 많지요. 나도 나를 돌보지 않고, 현실의 무게에만 허우적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네요. 나를 지켜봐 주고 감사해주는 이가 있다는 건, 나름 의미를 갖고 살았다는 것일 테니까요. D의 한 해는 어땠나요.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을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선생이 보내는 장문의 편지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갑자기 외로울 때, 어디엔가 무언가를 나누고 싶을 때, 용건 없이 쓰는 편지... 좋습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요.     


새해에 행복 D가 되길 바라요.     


Y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의 생활은 이렇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