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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 Sep 30. 2023

삶에 정성을 들여보기

‘조금 더 정성스럽게 생활합시다.’ 무인양품의 브랜드 철학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정성스럽게 생활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내가 내린 답은 안목이다. 무수히 많은 것 중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는 안목 말이다. 이 안목을 갖춘다면 나에게 어울리면서 동시에 나에게 이로운 것들로 일상을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 가장 가까이에 내가 좋은 안목을 기르도록 돕는 분이 계시다. 바로 우리 고모다. 고모와 단둘이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나는 고모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정성을 들이시는 분임을 깨달았다. 고모는 ‘좋은 것들’을 많이 알고 계신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삶의 내공과 연륜을 튼튼히 쌓아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고모는 그 ‘좋은 것들’을 내게 소개하시면서 내가 그것들을 직접 체험해보도록 이끄신다. 고모가 알려주시는 좋은 것들을 터특함으로써 공부로만 국한되었던 내 관심사가 넓어졌고, 나는 내가 무심했거나 무지했던 분야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정성스레 가꾸어야 할까.’ 이 질문을 내게 던지시고, 그 질문의 모범답안이 될만한 사례를 다채롭게 제시한 사람이 우리 고모다. 사람들이 고모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면, 내 안목을 길러준 은인같은 분이라고 소개해야 할 것이다.


고모와 떠난 푸켓 여행은 다시금 고모의 좋은 안목을 엿보고, 정성스러운 생활에 필요한 안목을 새로이 키웠던 시간이었다. 세세한 예시를 들자면, 고모는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났을 때나 수영을 끝낸 후 방으로 돌아왔을 때 호텔룸에 비치된 티백을 우려내어 따뜻한 홍차를 내게 건네주셨다. 고모는 새벽이나 오후에 늘 홍차를 한 잔씩 마신다. 새벽에 마시는 홍차는, 부드럽고 은은한 맛으로 몽롱한 정신을 깨운다. 오후에 마시는 홍차는, 누적된 피로로 노곤해진 몸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홍차를 마시며 조용히 일출이나 일몰을 감상하거나, 책을 읽는 고모를 따라하면서 나는 홍차를 마시는 행위가 사람을 잠시나마 ‘차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료수라고 하면 탄산음료나 커피밖에 몰랐고, 차면 다 같은 차인줄 알았던 나였다. 고모께서 홍차와 함께하는 일상을 알려주신 덕분에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티’나 ‘얼그레이티’가 카페 메뉴판에서 보이게 되었고, ‘TWG’나 ‘포트넘 메이슨’ 같은 차 브랜드에 관심을 키우게 되었고, 가끔은 집에서 혼자 커피 대신 차를 우려 마시는 사람으로 변했다.


호텔 내부 음식점이나 카페에 갔을 때, 고모께서는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에는 식당 내부의 인테리어와 장식을 주의깊게 살펴보셨고, 주문한 메뉴가 나온 후에는 음식을 맛보시면서 음식이 조리된 과정과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에 관심을 보이셨다. 고모께서는 늘 관찰과 분석으로 얻어낸 ‘인사이트’를 내게 친절히 설명해주신다. ‘나중에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해야하는 일이 생길 때, 이 음식점처럼 미니 캔들과 꽃을 식탁 정중앙에 놓고, 냅킨을 접어서 병에 예쁘게 꽂는다면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거야. 친구들한테 센스 있다는 칭찬도 받을 수 있고.’ ‘간단한데 맛있는 음식이야. 토마토를 간 다음, 바게트 위에 잼 펴바르듯이 얇게 올려서, 올리브유를 듬뿍 뿌려서 만든 음식인 것 같아. 집에서 한번 직접 만들어서 먹어봐. 바게트, 토마토, 올리브유만 있으면 되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을거야.’ ‘레몬그라스 향이 나네. 생강향이랑 비슷하면서도 달라. 고모는 이 향을 참 좋아해. 과하지 않게 산뜻하면서 시원하거든. 향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어. 고모는 집에서 좋아하는 향을 피워놔. 지나칠 때마다, 머무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거든.’


고모가 해주셨던 말씀들은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나는 고모를 보면서 ‘맛있는 거 먹고 행복했으면 그만’ ‘예쁜 거 보고 행복했으면 그만’하며 사진이나 마구 찍어댔던 내 안일함을 뉘우친다. 의도하셨는지 의도하지 않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모께서는 ‘좋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 좋은 것을 내 삶에 어떻게 입힐 수 있을까?’하며 고민해보는 사고방식을 내게 탑재해주셨다. 나는 경험으로 터특한 좋은 것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현해보며 삶의 지혜를 기르시는 고모를 존경한다. 일기를 쓰시고, 그림을 그리시고, 책을 읽으시고, 옷을 고르시는 고모를 핸드폰 화면을 보는 척하면서 힐끔 엿볼 때 행복했던 이유는, 내 두 눈에 담기는 모습이 고모가 정성스런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고모와 단둘이 해외여행을 갔거나, 고모께서 무언가를 내게 사주셨을 때 아빠는 내게 ‘너는 고모에게 평생 감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철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고모께서 나를 근사한 곳에 데려가주시고 예쁜 것을 사주시기 때문에 고모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안다. 고모는 경험을 통해서 안목을 기르는 방법, 나아가 삶에 정성을 들이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렇기에 나는 고모에게 평생 감사해야 한다.


에필로그. 고모의 답장


선우에게

 

정성 가득한 선우의 긴 글에 ‘고마워’와 ‘이모티콘 하나’ 달기엔 아쉬워서 좀 긴 답장을 써보려고 책상 앞에 앉았어.

선우가 나를 봐주는 시선이 참 따뜻하고, 나는 우리 조카가 보는 시선만큼의 사람일까? 하고 살짝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냥 기쁘게 받아들이려고 해. 그리고 삶을 정성스레 가꾼다는 표현이 고마워.

그러고보니 내 삶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 즉 나의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했던 것 같아. 먹고 살기바쁜 부모님 아래에서 첫째인 나는 주위에 어떤 레퍼런스도 없이 혼자서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며 배우고 내 취향을 찾아갔던 것 같아. 단순한 브랜드나 기호의 문제가 넘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 나는 늘 궁금했거든. 내가 왜 살아야만 하는지.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에 직면 했어.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게 중요했을 거야. 그 틀 안에 나를 가두지 않으려는 노력 또한 언제나 필요하지만.

내가 다양한 경험을 노력을 통해 가지게 된 사소한 안목이나마 우리 조카에게 알려주고 싶고, 그보다는 선우 스스로 느끼게 하고 싶었던 내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줘서 정말 고마워.

너와 그 많은 여행을 하면서, 아름답거나 때로는 쓸쓸한 풍경조차 때로는 삶에 위로가 된다는 것을, 스쳐 지난 어떤 거리가, 잠시 머문 카페의 창 밖 풍경 하나가, 힘든 날 문득 위로로 찾아온다는 것을 네가 알게 되기를 바랬어. 그래서 때로는 그 사소한 것으로도 쓸쓸하고 지친 시간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선우 글에서 ‘내가 지독하게 외로웠을 때’라는 문구는 고모를 아프게 해. 하지만 삶의 쓰고 거친 부분을 다 지워서 네게는 좋은 것만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너는 네 몫의 아픔을 겪고 일어서야 너로 완성될거라는 것도. 아픈 경험이라고 해도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에 따라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도 배웠어.

그리고 ‘이따금씩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과 걱정 때로는 강박에 휩싸여’라는 문장도 나는 아프지. 나 역시 그 정도는 아니지만 늘 불안하고 걱정 많은 사람이니까 너의 마음을 적어도 상상할 수는 있어. 난 아직도 그렇지만 그래도 덜어낸 것 같아. 어느 날 내 불안감을 들여다보다가 “ 나는 여전히 예기치 못한 어떤 일을 맞닥뜨릴 것을 걱정하지만. 이제 내 안에는 그걸 감당할 힘이 있을 거야. 그 힘을 믿어보자”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수첩 한 편에 써놓고 가끔씩 들여다 봤어.

선우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야. 네 마음을 들여다보고 불안을 적어보고,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하고 말해봐. 그리고 너를 증명하려고 노력하지마. 다른 사람의 인정을 위해 우리를 몰아세울 필요는 없어. 다른 사람은 너 자신만큼 너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잊으면 안돼. 잘 안되면 청소라도 해 보렴. 몸을 움직이는 것은 도움이 될 거야.

지난 수년 간 필라테스를 하면서 몸과 마음은 언제나 함께 간다는 것을 내 모든 근육을 통해 배웠어. 겁이 많고 긴장이 많은 나는, 몸에도 긴장이 많고 새 동작을 할 때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머리로는 두렵지 않을 때조차도 내 몸의 근육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어. 하지만 내 근육이 운동에 익숙해지면 몸의 두려움도 마음의 두려움도 없어져. 삶의 무게도 그만큼 덜어진 것 같아. 그리고 필라테스 동작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도 그냥 그 동작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운동효과는 있다는 것도 배웠어. 겸허하게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꾸준히 노력하면 조금씩 바뀐다는 것을 몸을 통해 배우고 있어. 몸을 바꾸면 마음도 바뀐 단다.

 

정말 사랑하는 조카, 선우야.

새 학기가 시작되네. 그 시작이 부담스럽겠지만 너는 또 잘 해낼 거야. 하지만 ‘잘’에 방점을 찍지 말고 네가 무엇을 경험하고 어떻게 해석할 지에 더 집중 하렴.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면, 미래를 살아갈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올 거라는 걸 믿어봐.

그리고 고모가 언제나 너의 삶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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