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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 Sep 09. 2023

나의 특별한 글쓰기 선생님

    학창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는 항상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숙제를 내셨다. 서른 개 정도의 간단한 질문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자기소개서 유인물은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자기소개서는 치밀하고 냉정해야 하는 보고서보다 어렵고 까다로운 글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해야 자기소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기소개서는 자신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치열하게 분투한 소수의 사람만이 작성하는 희소하고 권위 있는 글이다. 나에게 아직 ‘나’는 수수께끼였다.


       모든 일에는 특별한 예외가 발생하길 마련이다. 막막한 질문 중 유일하게 내가 유일하게 반기는 질문이 존재했었다. 바로 ‘나의 특기는 무엇인가요?’였다. 이전까지 쩔쩔맨 나는 그 질문과 마주하는 순간에만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 자신 있게 답을 썼다. 내 답은 글쓰기다. ‘쓰고 싶다’의 선택이든, ‘써야 한다’의 의무이든 상관없이, 글쓰기 과정에서 겪은 고통과 시련의 정도와 상관없이 나는 한 편의 글을 완성할 때마다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글쓰기는 내가 끈질기게 도전하는 행위였고, 미숙한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작고 소중한 한 가닥의 자아였다.


       나는 탐정처럼 이 한 가닥의 자아의 근원을 파헤치기로 결심했다. 글쓰기는 어떻게 나를 대변하는 정체성이 되었을까? 내 글쓰기 철학을 생각하니 이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이 명쾌하게 나왔다. 내 글쓰기 철학은 ‘글은 절대 혼자의 힘으로 완성되지 않는다’이다. 글쓰기가 내 정체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진정한 글쓰기를 깨우치도록 도우신 선생님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분들과 함께하며 나는 글쓰기로 설레었고, 글쓰기로 각성했고, 글쓰기로 치유했다. 그분들의 가르침 덕분에 나는 글로 나를 발견하고, 글로 나를 표현하며 궁극적으로 글로 나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여태껏 나는 특기와 취미로 글쓰기를 내세우고, 글쓰기가 내 자아의 중요한 정체성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이를 가능하게 만드신 선생님들의 노고를 망각하고 있었다. 염치없고 부끄러웠다. 나는 글쓰기의 선생님들을 회고하며 내가 그분들과 글쓰기로 교류하면서 내 자아를 성숙시킨 과정을 돌이켜보았다.


       첫 번째 은사님은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이다. 그 선생님 덕분에 나는 글쓰기에 설레었다. 글쓰기로 세상을 재해석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인 나는 매일 한 페이지 분량의 일기를 제출해서 선생님의 확인을 받아야 했다. 선생님께서는 모든 학생의 일기에 예쁜 파란색 펜으로 정성스러운 감상을 적으셨고 ‘참 잘했어요’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귀여운 도장을 일기 위해 찍으셨다. 철없던 시절의 내 글쓰기 목적은 타인의 인정이었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글로 선생님과 친구들의 칭찬을 듬뿍 받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내 하루는 마법처럼 특별하지 않았고 지독하게 단조로웠다. 참신한 소재가 부재하므로 내 글은 필연적으로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속상함이 내 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난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내 일기장 모퉁이에 정갈한 글씨체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다. “특별하게 바라보면 특별해져요. 선우의 섬세함과 예민함을 발휘해보지 않을래요?” 그 글을 읽고 나는 내 소중한 일상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깎아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태도의 문제를 내 환경의 문제로 비겁하게 책임을 전가했다. 호기심 충만한 태도로 당연한 일상을 줌 아웃해서 낯설게 보거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당연한 일상을 줌 인해서 꼼꼼히 살피면 평범함이라는 베일에 싸여 숨겨진 일상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내 일상의 어떤 특별함을 어떻게 섬세하고 예민하게 밝혀 볼까?’ 일기 쓰기는 하루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시간이 아닌 제일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으로 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께서 해당 코멘트를 통해 글쓰기란 내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나만의 고유한 관점을 함양하는 행위임을 나에게 알리려고 하신 것 같다. 선생님 덕분에 나는 글쓰기로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해 세상에 용감히 뛰어드는 모험가가 될 수 있었다. “선우의 개성 있는 글을 참 재밌게 읽었단다. 너의 특별함을 잃지 말고 계속 갈고 닦기를 바랄게.” 초등학교 졸업식에 선생님께서 나에게 선물하신 손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나는 일상의 보물을 찾아야 하는 사람임을 선생님과의 글쓰기로 깨달았다. 예사로움을 빼어남으로 만드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두 번째 은사님은 중학교 논술 선생님이시다. 그 선생님 덕분에 나는 글쓰기로 각성했다. 글쓰기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논설문을 미리 작성해오면, 선생님께서 그 논설문을 평가하시는 방식으로 논술 수업이 진행되었다. 첫 수업에서 선생님께서는 매의 눈빛으로 내 글을 사납게 읽으시면서 빨간색 펜으로 선명한 밑줄을 치셨다. 공책이 순식간에 빨간색으로 도배되었다. 나는 내가 잘 쓴 문장에 강조 표시하기 위해 선생님께서 밑줄을 치고 계신다고 착각했다. 우쭐해지려는 찰나 내가 못 쓴 문장을 제거하기 위해 선생님께서 밑줄을 치고 계신다는 잔인한 진실을 파악했다. 나는 충격에 빠졌다. “이건 일기와 달라. 너의 분명한 주장과 근거가 드러나야 해. 그런데 너의 문장은 겉만 번지르르해. 너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과 너의 진짜 목소리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선생님께서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 손에 쥐고 계신 빨간색 볼펜이 내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내 글이 형편없다고 하셨기에 분해서가 아니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그랬다. 내가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었던 내 추악한 밑바닥이 들통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회적 쟁점에 대한 입장을 제시할 때 안일하고 소극적인 태도로 다수의 보편적인 관점에 따랐다. 내 주장과 논리를 세우는 것을 꺼렸다. 이를 확립한 경우에도 나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을 회피했다. 의도적으로 뿌옇게 흐린 시각과 허물어버린 문장을 선생님께서 포착하셨다. 이후 다음 시간까지 다시 써서 오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리며 홀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우선 글쓰기에 결코 나의 얄팍한 속임수가 통하지 않으며, 투입한 진실한 노력에 칼같이 비례하는 완성도가 산출될 만큼 글쓰기는 정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탐지기인 선생님과 같은 독자의 레이더망에 작가의 가식, 위선, 거짓은 전부 탄로가 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글쓰기로 나 자신의 줏대 없는 관점과 이로 유발되는 내 글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개선해야 비로소 현안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우수한 글을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통찰은 그 행위의 주체인 내가 명백한 시각을 확립하고 있어야만 실현되기 때문이다.


         “진짜로 이해하면서 쓴 문장이야? 진짜로 네가 생각하면서 쓴 문장이야? 이게 최선일까?” 선생님께서는 먹잇감을 포획한 맹수처럼 내 글을 질기게 물고 뜯으셨다. 선생님의 영향으로 나는 선생님께서 내게 하셨던 질문을 나에게 스스로 던지면서 글을 썼다. “생각을 멈추면 안 돼. 언제든지 쓰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단단히 새겼다. 나는 지금 ‘깨어 있는’ 생각을 ‘뚜렷하고 진실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지 글쓰기를 하면서 철저하게 점검했다. 나는 진정성을 갖춘 글쓰기를 하면서 혹독하게 내 뭉툭한 시각을 날카롭게 갈고 닦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임을 선생님을 통해 깨우쳤다.


          세 번째 은사님은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이다. 그 선생님 덕분에 나는 글쓰기로 치유했다. 글쓰기로 마음을 챙기는 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문학 수업을 듣고, 선생님께서 주관하신 국어과 행사에 참여하면서 문학에 대한 비평문과 감상문을 자주 작성했다. 선생님은 내가 어리둥절하게 되는 발언을 항상 하셨다. “신기해, 선우야. 다른 글에는 생각을 막힘없이 쓰는데, 유독 이런 글에는 감정이 무척 절제되어 있다? 글로 너를 살펴보는 연습을 하는 게 어떨까? 물론 나에게도 서툰 일이지만.” 시험공부를 하고 수행평가를 준비하느라 하루하루가 바쁘고 정신없이 흘러가는데, 어떻게 수험생에게 철학자가 되라는 조언을 하실 수 있을까? 무척 당황스러웠다. “너의 바른 글씨체보다 너의 삐뚤삐뚤하고 못난 글씨체가 나는 더 좋단다.” 선생님의 정체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일까? 왜 모든 정상의 기준을 비정상으로 비틀려고 하실까? 무척 황당했었다.


        메마른 현실주의자인 나는 선생님을 엉뚱한 낭만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눈 딱 한 번만 감고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감정을 쏟아내면서, 최대한 완벽한 글 대신 거칠고 날 것의 글을 쓰려고 시도했다. 내가 놓쳤을 수도 있는 선생님의 현명한 의중이 존재할지 궁금했다. 읽기 자료로 제공하신 작품을 찬찬히 읽으면서 시행과 문장이 내 마음에 일으키는 강렬한 파장에 집중했다. 무채색으로 치부한 내 마음이 실로 다채로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외부의 지식만 갈망하고 내부의 감정을 차갑게 방치한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감상문과 비평문을 작성하면서 나는 내 감정을 소중히 보듬으며 이를 문장에 생생하게 투영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글로 움츠린 감정을 아름답게 터뜨리기를 바라신 것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너를 위한 비밀의 시간은 꼭 확보하렴.” 고3이 될 때 선생님께서 주신 조언이었다. 보조제인 문학 없이도 나를 계속해서 가꾸어 나가라는 홀로서기의 선포였다. 스터디 플래너의 위쪽에 작은 일기 공간을 확보했다. 단 한 줄이라도 꾸준히 감정을 기록하면서 내 풍부한 마음의 색깔이 흑백으로 변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나는 글쓰기로 경직을 풀고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선생님 덕분에 깨우쳤다.


       지금까지 세 분의 은사님과 함께했던 내 글쓰기 연대기를 살펴봤다. 따뜻한 햇살 같은 선생님을 만나 해석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삶의 초점을 조정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세찬 바람 같은 선생님을 만나 비판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삶의 프레임을 구축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잔잔한 노을 같은 선생님을 만나 성찰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삶의 찰나를 포착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내가 어떻게 성장하여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다면, 내가 어떤 은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어떤 글을 써왔는지를 살펴야 한다.


         은사님의 가르침은 내 글쓰기 근육, 뼈와 살이 되어 나를 단단히 지탱하고 있다. 글을 쓰다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길을 잃었을 때마다, 나는 은사님의 말씀을 상기하며 내 글쓰기 근육, 뼈, 그리고 살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펜을 잡아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그 글로 나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키고, 내 자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다. 나와 떼어 놓을 수 없는, 내가 글쓰기에 눈뜨게 한, 지금의 ‘글 쓰는 김선우’를 만든 은사님을 향한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면서 나는 이 여정에 끈질기고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나의 자기소개서에서 글을 쓰며 성장하는 사람으로 나를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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