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환자를 처음 보기 시작했던 때가 떠오른다.
내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환자들을 마주하던 날, 나를 예약하고 찾아온 이들을 보며 나는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대학병원까지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여러 의사를 거쳐 내 앞에 서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택되었다는 감각은 분명 기뻤지만, 그만큼 조용한 긴장도 함께 따라왔다.
그때의 나는 아픈 환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를 가장 먼저 생각했다.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몸을 살피고, 가능한 진단들을 좁혀가며 어떤 검사와 치료가 필요한 지 오래 설명했다. 당시의 나는 환자에게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수록 더 좋은 의사라고 믿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사실이 곧 나의 성실함이자 책임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며 예약은 빠르게 늘어났다.
응급실로 오는 환자들, 수술 후 경과를 보러 오는 이들, 소개를 받고 지방에서 KTX를 타고 오는 환자들도 있었다. 책임져야 할 환자가 많아질수록 공부하는 시간도, 병원에 머무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래도 그 시간은 싫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내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수술한 환자들은 잘 회복해 일상으로 돌아갔고, 나 역시 이전보다 더 능숙해지고 있다는 감각에 빠져 있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오는 것처럼 보였고, 그만큼 의사로서의 자신감도 자라났다.
하지만 환자가 늘어날수록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는 절박함은 이전과는 다른 결을 띠기 시작했다.
심한 교통사고로 관절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응급 환자, 다리가 썩어 악취가 날 정도로 즉각적인 수술이 필요했던 환자, 당장 수술이 필요하지만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결정을 망설일 수밖에 없던 이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절박했고, 그 무게는 진료실 안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과정에서 잘 회복한 환자들도 있었지만, 계획만큼 낫지 않은 환자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곳에서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온 환자들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치료를 맡고 나면 그런 사정보다 지금 내 앞에 놓인 환자의 상태가 더 크게 다가왔다.
환자들은 끝까지 나를 믿고 따라왔고, 그 마음은 오히려 나를 더 쉽게 물러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곳의 도움을 빌려서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더 시도하는 일이 정말 환자를 위한 일인지, 아니면 내가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내 욕심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진심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수술 후 찍은 엑스레이를 모니터에 띄워둔 채, 한참 동안 진료실을 떠나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해줄 수 있다는 사실과, 해도 된다는 판단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지금도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제는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을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더 오래 고민하게 된다.
모든 환자는 불편함이 있어서 병원을 찾는다. 의사라면 당연히 환자가 좋아질 수 있도록 내가 가진 것을 다 내어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선한 의도가 언제나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 적극적인 치료가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무엇을 더 얹을 것인가 보다,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보는 환자들 가운데도 그런 이들이 있다. 충분히 애를 썼는데도 여전히 통증과 불편 속에 머무는 사람들. 그런 환자를 마주할수록, 익숙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더 해주는 것이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인지 다시 묻게 된다.
돌아보면 의사로서의 성장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과정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순간에는 멈춰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판단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되는 것.
어쩌면 지금의 나는 그 무게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