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문하는 학교 그리고 은행에서 만난 한국인 직원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반갑게도 학교 기숙사 룸메이트에게서 이메일이 와있었다. 비록 같은 방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엌을 공유해서 사용할 다른 방 룸메이트였다. 기숙사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메일과 이름 정보를 보며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룸메이트들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학교가 처음인 나와 다르게 다른 학년으로 올라가는 그녀는 다른 룸메이트들과 예전에 함께 지내본 적이 있다며 좋은 친구들이라는 얘기도 해주고,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해달라고 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 후엔 (뉴저지) 룸메이트와 함께 맨해튼으로 넘어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Path를 타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Path train' 카드를 $5를 주고 구매해야 했다. 그런데 이놈의 현금 결제가 또 내 발목을 붙잡았다. 급하게 근처 ATM 기기를 이용하는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비밀번호를 틀리고 말았고, 그 후의 시도도 거부당하게 되자 결국 룸메이트에게 돈을 빌려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Path train 카드는 충전해서 사용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해당 기기에서는 카드 사용이 가능하여 $26를 지불한 후 10번의 트립을 충전하였다.
사실 한국에서 간간히 뉴욕 지하철에 대한 사진이나 영상을 볼 때 책을 보는 사람들이 많기에, 저기엔 저런 낭만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Path를 타고 이동을 시작하자 데이터가 끊겨 버렸고, (물론 무료 와이파이 같은 것도 제공되지 않았다.) 책도 없는 난 처음 타본 티를 내듯 열심히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Path를 타고 도착한 역에서 학교까지는 다른 지하철로 갈아탈 필요 없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가까운 거리였다. 룸메이트는 약속 장소까지 지하철로 갈아타야 한다며 함께 Path 역에서 내린 후 헤어지고, 난 은행에 가려는 생각이었지만 내리자마자 보이는 학교 깃발들에 홀린 듯 학교 빌딩으로 향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선 빌딩에서는 경비원 아저씨가 유쾌하게도 질문은 공짜이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침 식사를 한 덕분인지 두뇌 회전이 잘 되어, 이번에 입학하는 학교 학생인데 학생증을 수령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경비원 아저씨는 우선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며 학생증을 수령할 수 있는 다른 빌딩 주소를 알려주셨다. ‘축하한다’는 가벼운 말 한마디에 학교에 대한 프라우드까지 느껴지다니. 말의 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다른 빌딩에 도착한 후엔 감사하게도 아까 전 경비원 아저씨가 연락을 줬다며 학생증 수령이 가능한 곳을 바로 소개받아 빠르게 수령할 수 있었다. 비록 학교 첫 방문에서 한 것은 학생증 수령밖에 없었지만 설레는 마음을 가득 충전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Chase 은행으로 가던 도중에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함께 횡단보도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며 물어본 결과, 한 분에게서 누군가가 공짜로 뭔가를 나눠준다더라 하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뭘 나눠주길래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려 나가는 걸까 궁금증을 마음에 담아두고 은행으로 들어갔다. 계좌를 개설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i-20 서류, 여권과 함께 운이 좋게도 마침 방금 발급받은 학생증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셨다. 다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은행원은 “Perfect”하다며 함께 자리로 가 예약 없이 바로 계좌 개설을 진행했다. 1:1로 앉아서 업무를 보는 공간에선 대출과 같은 큰 업무들만 담당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예상 밖이었다.
계좌 개설부터 체크카드 발급까지 무사히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한국 외화 카드를 이용해 출금 후 chase 계좌로 입금을 진행하기 위해 은행 내에 있는 ATM기기로 향했다. 그 와중에 은행 밖에서 계속해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고,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ATM기기에서는 출금이 계속해서 불가능하다는 오류 메시지가 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잘 인출했는데 왜 갑자기 불가능한 건지. 이유도 알 수 없자 답답한 마음이 계속됐고, 은행원은 ATM기기의 문제일 수 있으니 날 서서 용무를 볼 수 있는 은행원에게 데려갔다. 서서 용무를 보는 곳에선 이런 업무를 담당하는구나. 수수께끼가 풀린 순간이었다.
해당 용무를 봐주기로 한 은행원은 흑인 은행원이었는데, 심화되는 밖의 소란 소리에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여 잠깐 창문을 바라봤더니 경찰들이 온 거리에 다 있었고, 경찰차들이 분주하게 다니는 것이 보였다. ATM기기에서 이미 패닉이 온 상태에서 외부 상황까지 무섭게 흘러가자 나의 영어 리스닝 실력은 더욱 퇴화되기 시작했다. 은행원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나에게 몇몇 질문을 물었지만, 원래도 흑인 억양을 알아듣기 힘들었던 난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흑인 은행원은 나에게 답답함을 노골적으로 분출하였고, 끝내는 다른 담당자가 다가와 한국어가 가능한 다른 직원에게 인계해 주겠다는 말을 했다. 흑인 은행원은 그 담당자에게 속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감사하다는 의사를 전했다. 한국인 직원에게 인계된 사건은 나에게는 꽤 굴욕적인 사건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한국인 직원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었어요?”라고 부드럽게 묻는 말에 난 속에 묵혀둔 답답한 마음을 맘껏 한국어로 표현했다. 카드의 문제일 수 있으니 카드사에 전화를 한 번 해봐야 할 것 같다며 전화를 해 본 끝에, Path card를 발급받기 위해 사용했던 ATM 기기에서 틀린 비밀번호가 이 모든 사건을 초래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해외에서는 비밀번호가 3번 틀리게 되면 자동으로 카드 사용을 중지시킨다고. 아마도 이전에 2번 더 틀린 적이 있었나 보다. 안전을 위해서는 정말 좋은 장치이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오류 내용을 인지할 수 없으니 그만큼 답답한 장치였다. 그렇게 통화를 통해 무사히 카드 중지를 해제하고 궁금한 게 더 있으면 여쭤보라는 말에 여러 질문을 하며 미국엔 ‘통장’이 없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감사합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밖에서는 소란 소리가 들렸고, 은행에서는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결국 잠깐 문을 잠그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난 입국 후 첫 방문한 맨해튼에서 은행에 잠시 갇히게 된 경험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은행을 나오고 나니, 하늘엔 헬기가 떠있고 심지어는 말을 타고 다니는 경찰들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진귀한 경험을 해서 좋다고 해야 할지.
아침 식사로 전날 남긴 ‘사모사’를 가볍게 먹은 게 다였던 난 배가 고파 맨해튼에서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마침 근처에 파이브 가이즈가 있었는데, 미국의 3대 버거라고 일컬어지는 ‘쉑쉑버거’, ‘인 앤 아웃’, ‘파이브 가이즈’들 중 유일하게 내가 먹어보지 못한 버거라 호기심이 가 바로 시도해 보기로 했다.
"Little Cheese Burger, Little fry, ‘Large’ soda 주세요” 난 한국에 있을 때도 항상 탄산음료는 라지를 시켜 먹는 편이었기에 자연스러운 메뉴 주문이었는데, 직원은 의아한 듯 진짜 ‘라지’ 소다가 맞냐고 되물어 봤다. 계산을 끝내고 컵을 받아 들자 왜 점원이 되물어 봤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이건 라지가 아니라 엑스라지라고 표기해야 할 것 같은데요. 후에 룸메이트에게 해당 얘기를 해줬더니 “No one ordered large soda”라며 웃었다.
그리고 감자튀김만큼은 꼭 ‘Little’ 사이즈를 시키기를 추천하는데, 물론 지점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보통 감자튀김용 컵에 감자튀김을 담은 뒤 포장 종이봉투에 넣어주는 것과 다르게, 여기서는 감자튀김용 컵을 포장 종이봉투에 넣어둔 후 감자튀김을 종이봉투에 쏟아붓는 후함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도 사실상 라지 감자튀김인데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소동 때문인지 가는 문이 폐쇄되어 있기도 하고 Path가 역에 정차하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둥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무사히 집 근처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치인데 웬 자신감이 붙었는지, 집까지 지도 없이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지도맵을 이용하지 않았더니 10분 거리인 집을 30분째 헤맸다. 결국 지도의 힘을 빌려 집 근처에 다다르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룸메이트가 손은 흔들며 다가왔다. 룸메이트를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 내가 길을 헤매었었구나.
룸메이트와 함께 집에 도착한 후의 공통 대화 화젯거리는 역시 몇 시간 전 맨해튼에서 벌어진 소동이었다. 함께 “Chaos erups in New York City’s Union Square after promise of free PlayStations(무료로 플레이스테이션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한 후 뉴욕 유니언 광장에 일어난 카오스)”와 같은 제목으로 나온 ABC 뉴스를 보며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었다. 트위치 인플루언서가 구독자에게 무료로 게임기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해서 그 많은 인파가 몰렸던 거라니. 이 순간이 나에게는 처음 보는 ABC 뉴스의 순간이었다.
말을 탄 경찰들도 궁금해서 왜 말을 타는지 룸메이트에게 물어보았더니, 말을 타면 높이가 더 높아져서 경찰차로는 닿지 않는 시야까지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룸메이트와의 대화는 내가 궁금했던 여러 정보에 대한 의문점을 풀 수 있어 항상 즐겁다.
오늘은 정말이지 다이내믹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