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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더독 May 14. 2023

명예를 위하여.

아 위하여.


'스토아학파'의 특징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기준으로서의 쾌락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스토어학파'의 입장은 지혜로운 사람, 좋은 사람, 철학자가 본성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도덕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를 실망시켜 불완전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내 시조는 고려시대 무신이었다.


나는 한반도의 '스토아학파'이다. 매일 글을 쓴다. 도덕적인 책임을 충만히 해야만 하기 때문에, 쾌락을 최소화한다.(= 그냥 여자 안 쫓아다닌다는 말이다. 멋지게 말해보고 싶었다. 부자가 되기 위한 과정에 있다. 힘을 키우고 있다.)


나는 남자라면 이렇게 사는 게 가장 현명하다고 본다. 주변에도 권한다. 받고 적용하는 건 그 사람들 문제이지만 말이다. 대부분 수용을 못한다. 이게 현명하다고 하는 이유는 이렇다.



1. 세상에는 강함과 약함이 있다. 그 모든 것의 근본 원리는 힘이다. (=힘이 없으면 숙이고 들어간다.)

2.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인풋 대비 아웃풋이 형편없다.

3. 인풋이 많아진다. 이는 자원 손실로 이어진다.

4. 자원손실은 현재의 전력을 보다 약화시킨다.

5. 쾌락의 1사이클이 마무리되면, 전력이 더욱 축소되어 있다.

6. 이게 인생에서 반복된다. 골로 간다.



'스토이즘'을 채택하고 자신을 하나의 국가라고 생각한 뒤, 경영에 참여하면 이렇게 된다.



1. 도덕적 책임 완수를 위해서는 강함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힘이 없다. 힘을 기를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2. 세상에 쾌락은 많다. '스토이즘'이라고 했다. 쾌락을 거부한다. 자원 손실을 막는다.

3. '스토이즘'을 행하는 인간보다 그렇지 않은 인간들이 배로 많다.

4. 상대적으로 힘을 빠르게 비축한다.

5. 현대 시대에는 30대 중반 - 40대 초반 사이에 선진국 반열에 진입할 수 있다.

6. 남은 인생을 군림한다. 힘으로 세상을 제압한 후, 도덕적 책임을 다한다.



말과 문장으로는 간단한 원리이며, 행하기에는 뼈를 깎는 고통이 드는 일이다. 많은 남성들이 이를 끈기 있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쾌락'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여자 때문이다. 사실 이게 거의 다다. 나 또한 건강한 남자고 그러한 쾌락의 유혹을 받는다. 나는 이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표면적인 방법은 커피와 운동, 흡연과 락앤롤이다. 극한값으로 둔다. 마라톤에서 설명의 재료를 찾아왔다. 마라톤을 뛸 훈련을 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원리가 있는데, 'Dead point'와 'Second wind'이다.


'Dead point'라는 것은 어느 정도 뛰다가 죽을 것 같은 첫 순간을 말한다. 기관지와 폐에 첫 번째 한계점 고통이 오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페이스를 유지하며 짧은 2회 들숨 & 짧은 2회 날숨을 지키면 'Dead point'를 지나게 된다.



이를 지나면 맞이하게 되는 다음 단계가 'Second wind'이다. 호흡근이 내 몸의 환경에 맞게 재조정된 이후이기 때문에 달릴만하겠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원리로 커피 / 흡연 / 운동 / 락앤롤을 극한값으로 맞추면 일정 시간 후에 여자를 무시하고 내 일에 집중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나는 건강하려고 운동하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 운동하는 것이다. 정말 괴로울 때는 6km 정도를 전력질주하는데 길에다 토를 한 뒤 다시 달린다. 독은 독으로 치료하고, 속세는 속세로 치료하며, 고통은 고통으로 치료한다.)




내면적인 방법은 '죄책감과 자괴감'이다. 현생의 내 부모형제를 포함, 모든 선조들까지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존재토록 하기 위해 그들이 겪었던 모든 고통을 생각한다. 우리는 2023년의 자유진영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평화시기이고 말이다.



쪽팔린다. 내 선조들은 변방에서 쳐들어오는 놈들과 칼질을 하며 나라를 수호했고, 수없는 기근을 버텨야 했으며 일제 강점기를 견뎌내고 한국전쟁까지 버텨내야 했다. 나는 자고 일어나서 배민으로 밥 시켜 먹고 아메리카노 쭙쭙거리고 산다. 그들 앞에서 내가 무슨 할 말이 있나.


이 시대에서도 성공다운 성공을 못 이뤄낸다면, 그들이 나를 사람취급이나 해줄까 싶다. 그런 죄책감과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내가 도덕적 책임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나는 떳떳한 죽음을 맞고 싶다. 가족을 잘 보살피고 선조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게 '명예'라는 것이다.




비록 '스토이즘'이 서양의 학파에서 탄생한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상당히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앞뒤 맥락도 훌륭한 사상이고 말이다. (로마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참고하라.)


쾌락과 행복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아니, '나'는 행복하고 싶은 것이다.

내 10년 뒤가 상당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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