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 전공, 과거 커리어와 무관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주식 투자를 병행하고 있다.
1인 사업을 하고 있다. 주식 투자도 스스로 한다.
한마디로, 빡세다.
몸과 정신이 긴장을 풀 새가 없다.
나는 왜 이런 위험한 삶을 스스로 창조하여 뛰어들었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의 본질은 힘의 차이에 의해 돌아간다는 깨달음, 자본주의의 구조와 작동방식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이를 진정 직시할 수 있게되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내 뇌는 피고용인의 삶을 거부한다. 피고용인은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가 맞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다고 세상 속성이 어디 가진 않는다.)
이대감, 최대감, 정대감 집 머슴으로 들어가 마님 대감님 하며 시다 하기에는, 나는 이미 글러 먹었다는 이야기이다.
아직 성공을 논할 단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산재한 리스키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업체의 대표로서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고 집행한다. 개인투자자로서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고 집행한다. 거기서 오는 자유의 짜릿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내 뇌는 그런 걸 좋아한다. 과정이 고통스럽든 아니든, 자유의 속성인 것이다.
자유와 주권이 있는 삶 그리고 떳떳함은 돈으로 구매가 가능하다는 이치를 외면하지 않게 되면, 종래에는 사업과 투자로 뛰어들게 된다.
나를 포함한 모두는 사업과 투자를 두려워 한다. 그 두려움을 감내하는 소수가 있다. 나는 그 중 한 명이다.
사실,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누구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어젠다이다.
인간이 지구에 존재한 이래로, 계급은 항상 존재해왔다. 태어날 때부터 어느정도 정해진 운명이 있어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인프라가 대단히 문명화된 것은 사실이나, 인간의 몸과 정신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힘에 의해 누군가는 노예가 되며 누군가는 영주가 된다.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시대에 따라 달라졌을 뿐이며, 대대로 세습되어가는 결과는 크게 차이가 없다.
다만, 과거에도 지금도 그 세습의 운명을 거스르려는 자들이 있었다. 옛날에는 그렇게 운명을 거스르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형벌과 고문 또는 사형당하거나, 변방으로 추방되어 자객에게 습격당하거나. 끝이 그랬다.
지금은 그렇게 까지는 안된다. 망하면 거지가 되어 비루하고 비참하게 끝나긴 하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우리 다 죽는다.
100년 금방일 것 같다. 바삐 살다 정신차리고 보면 한 달이 순간 삭제되어 있다. (어떤 90살 된 할아버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짜다 이래 늙어버렸는지 모르겠다.")
한 번 사는 인생,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렇지 못한 길이 있다.
간단한 것이다.
선택과 책임이 따를뿐.
그리고,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