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Schubert - Erlkönig
https://youtu.be/XoBo8dlPcQo?si=EOOyPajGZbdVKjt7
앞선 글에서 나타내었듯, 나는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명확한 목표를 두고 산다. 목표를 빠르게 이루기위해서 내가 가진 지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시도하고 있다. 많은 실패를 했다. 간간히 성공도 한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어찌되었든 세월이 수반되는 프로젝트이다.
지난 10년이 있었고, 앞으로의 10년이 있다. 그동안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계속해서 해야한다. 나는 철학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그 깊은 원리를 이리저리 끼워맞춰보는 것에서 내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 한다. 그렇기에 평범한 다른 이들보다는 용감한 편이며, 고통을 나름 잘 다룰 줄 안다.
그럼에도 나또한 사람이다. 1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 세월을 깡으로 버틴다는 것은 생각보다 멍청한 짓일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 내 나름의 자구책을 고민해보았다.
주식 투자를 통해 매해 복리 수익을 거두고 있다. 사업은 큰 실패는 없었으나 이렇다할 수확은 없었다. 다음 챕터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알바를 구해 몸과 시간을 갈아 넣고 있다. 먹고 사는데 필요한 비용을 졸라매어 돈을 다시 모으고 있다. 근로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을 필요에 의해서 억지로 참고 한다.
주로 몸을 굴리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하고 오후 늦게 퇴근하고 나면 졸음이 쏟아진다. 쉬는 날 없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어 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퇴근 후 서점을 갔다. 카페인으로 도핑을 하고선 부득부득 나섰다. 한 두시간을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 얼음을 입에 넣어가며 책에 빠졌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다시 읽어보고 있다.
나는 내가 왜 굳이 저렇게 했는지, 스스로를 분해해보았다.
몇 달 전에 쓴 글에서 그런 말을 한 적 있었다. 중간쯤의 보통의 삶이 가장 위험한 삶이니 추천하지 않는다고.
경제니 인플레이션이니 신경 끄고 동남아 해변가서 철학과 예술에 조예를 담고 유유자적 살거나, 성공을 목표에 두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하는 삶이 가장 안전한 삶이라고 말했었다.
나는 경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작가이다.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구조적으로 어떠한 위치인지, 내가 어떠한 식으로 레버리지 당하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다시금 내 신분이 확인된다는 뜻이다. 즉, 나는 시간을 팔아 근로노동을 하고 있으면 내 스스로가 인간 이하라는 느낌을 너무나도 차갑게, 이성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이건 무서운 것이며, 이런 자각이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기분을 아예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나, 나에 준할 만큼 진지하게 여긴 뒤, 실제 액션을 끊임없이 취하는 인물을 찾기가 상당히 어렵다.
내가 피곤해 죽겠는데도, 더러워진 몸을 씻고 뻑적지근한 다리와 허리를 끌고 부랴부랴 서점에 간 것에 어떠한 맹랑한 이유는 전혀 없다. 독서를 하는 것이 성공에 도움이 된다거나, 원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거나, 아니면 가을이 와서 그렇다거나 하는 이유들은 전혀 해당사항이 아니다.
성공을 겨냥한, 무일푼에서 시작한 삶은 고단하며 비루한 삶이다. 나는 내가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인간임을 당장 잠깐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주인공이 감옥을 탈출하여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던 장면의 감각을 나또한 찰나라도 느껴보려했던 것이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그러한 기분을 비슷하게나마라도 느껴볼 수 있는 것이 3가지 정도 있다.
1. 운동
내가 원할 때 멈추지 못하면 '노동'이고, 내가 원할 때 멈출 수 있으면 '운동'이다. 그래서 '운동'에서는 자유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나면 운동한다. 내가 주권이 있는 인간임을 잠시라도 느낄 수 있다.
2. 독서
내가 원하는 책을, 원하는 작가를, 원하는 생각을 간섭받지 않고 탐독할 수 있다. 거기서 발견한 좋은 지식이나 철학을 내 삶에 이식한다고 한들 잡아가거나 몽둥이 찜질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과거에는 잡아가거나 뚜드려 패던 시기도 있었으니까.)
3. 글쓰기
가장 좋아한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다. 이 지면에서 내가 받는 외부의 간섭은 없다. 내가 무언가를 관찰하고 사색하여 나온 독특한 생각을 내 생긴대로 적어낸다. 때때로 반응이 좋은 글들도 생기는데, 그럴 때 기분이 째진다. 이게 단순히 사람들 관심을 받았다고 기분이 좋아지는게 아니다. 이것은 내가 주권을 잠시나마 회복한 순간 속에서도 남들에게 썩 괜찮은 가치를 제공했다는 증빙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더라도, 먹고 사는데에 도움이 될 가능성을 아주 조금이라도 눈으로 확인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건 중장기적인 희망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희망이 있으면 살아나간다.
이 3가지가 내 앞에 깔려있는 가시밭길 10년의 국소마취약이 되어줄 것이다.
혼란에 빠진 2030들에게, 그리고 곧 똑같은 혼란에 빠질 운명인 10대들에게 전해본다. 내가 직접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보니, 진정 혼란스러움을 잠재우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이다. 삶을 양극의 극한값으로 사는 것이다. 중간값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사람은 사람마다 그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어렴풋이 또는 강렬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 가치를 온전히 향유하지 못했을 때, 혼란이 찾아오는 것이다. 또는 우울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를 온전히 향유하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다. 약이나 술 또는 여자나 남자가 아닌 것이다.
여러분의 몸과 정신은 애초에 멀쩡하다.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할 '자유'가 박탈되었기 때문에 우울해지는 것이다. 자본주의속에 사는 노예신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의 심신 상태를 오해하여 알코올이나 항우울제를 무심코 벌컥 들이키지 말라는 뜻이다. 그들은 부작용이 따르고, 그것이 심화되면 인생이 파괴되기에, 아무리 의학적인 기반이 있다고한들 반드시 선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앞서 간단히 서술한 양극값 삶의 양식을 자세히 풀어보겠다.
진정으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양극의 방법은 이렇다.
원화가치를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몸갈아서 몇 천 모아 태국, 라오스 또는 아르헨티나로 떠나라. 높은 화폐가치 차이를 이용해 아주 자유로운 영혼으로 인생을 즐기는 것이다. 경제니 세금이니 인플레이션이니 하는 것들을 아주 잊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꼭 철학, 종교, 예술에 싶은 조예를 담는 것이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런 말을 했다.
자유란 기회와 선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결과에 대한 책임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자유와 책임은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그 어떠한 성격의 자유이든, 대가가 따른다. 이 극한값의 삶은 부모부양, 결혼, 2세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는 양식이기 때문에 철학, 종교, 예술에 조예가 깊어야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이 충실히 달성되었을 때, 자유는 온전히 향유될 것이다.
나는 독실한 종교인이 아니고, 예술 전공자도 아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는게 스스로가 우스워질 것 같다. 다만, 철학의 부분에서는 구체적으로 추천할만한 내용이 있다.
다음은 '제논', '에픽테토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이시즘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핵심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에는 영겁의 시간이 있었으며 미래에도 영겁의 시간이 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든 당장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지금 찰나의 몇 초이다.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이미 다 죽어 흙으로 돌아갔으며, 그 기억또한 빠르게 잊혀진다. 그리고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원자와 분자들이 신의 뜻에 의해 무작위로 한 시간 한 곳에 모였다가 다시금 그의 계획에 의해 자연 속으로 흩어지는 순환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영혼의 평정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당장의 지금 찰나에 공동체를 위한 옳고 선한 일을 계속 행하는 것이다. 이외의 일들은 이보다 가치가 있을 수 없기에, 무관심한 것이 이성적이다. 예컨대 사회적으로 찬양 받는 가치들(성공, 명예, 부, 장수, 건강 등)이나, 반대로 멸시 되는 가치들(실패, 죽음, 병환, 성적 쾌락, 음주가무 등) 따위의 것들에 좋다 나쁘다 해버릇 하는게 아니라, 그냥 무관심한 것이다.
다음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설명되는 내용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은 자살하거나 회복 (극복)하거나 두 가지의 가능성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수렁에 빠진 이상, 이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살을 택하게 된다는 것. 카뮈가 제시한 해법은 간단히 말해 “삶에 대한 이유를 신이나 가족, 국가와 같은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지 말고 삶 그 자체로 받아들여라”다. 즉, 실존해서 얻는 것 (신앙, 사랑, 충성, 우정 등)을 살아갈 이유로 삼지 말고 실존 그 자체를 살아갈 이유로 삼으라는 것. 삶은 무의미한 작업의 반복이지만, 삶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의미함을 사랑하고 유지하도록 노력하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바위가 반대편 골짜기로 굴러떨어지는 상황에서 시지프는 다시 바위를 굴려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라야 하지 않겠냐고 하고, 이것이 유명한 마지막 문장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이다.
- 나무위키
성공을 목표에 두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는 근로노동자 또는 자영업자가 아닌, 기업가 또는 투자자의 형태로 변모하는 삶을 말한다. 당장에는 현금성 순자산 10억이 한국 유한계급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인플레이션에 의해 이러한 기준값은 높아질 것이다.
나는 주식 투자 6년차이며, 1년 가량 여러가지 내 일을 시도해보고 있다. 투자의 경우, 초반의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지금은 어느정도 실력이 안착되었다. 사업(지금은 하룻강아지 수준의 장사치이지만)은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실패의 쓴맛을 보았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것도 나에게는 나의 일이며, 사업의 일환이다.
나는 (+) 극한값 방법을 설명할 때, 중력에 빗대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해하기가 참 좋기 때문이다.
우주왕복선의 발사 직전 모습을 떠올려보라. 우주왕복선은 거대한 몇 개의 추진체에 얹혀있다. 추진체에는 긴 시간 동안 연료가 주입되며, 온도가 떨어진다. 추진체 주변에는 얼음이 끼고 자욱한 수증기가 표면을 뭉게뭉게 감싼다. 발사 당일 당시간이 되면, 카운트다운이 이어진다.
카운트가 끝나면 추진체 노즐에는 강력하고 묵직한 불꽃이 튄다. 거대한 우주선이 중력장을 벗어나는 고도까지 올라가게 해주는 것이다.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기에, 주 추진체에 보조 추진체까지 덕지덕지 있다. 중간에 멈추는 일이 없으며, 추진체들은 연료가 소진되면 대기 중에서 분리되어 아무개 바다로 떨어진다.
몇 초가 흐르면, 기체는 마하의 속도로 올라간다.
가끔은 이 과정 중, 원인 모를 문제가 생겨서 우주인들을 태운 채, 공중 폭발이 일어나기도 한다. 과거 챌린지 호의 승무원들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전원 사망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운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는 일이다.
무중력 저궤도에 오르면 모든 추진체는 버려진 상태이며, 이제는 에너지 없이 고도에 머무를 수 있다. 약간의 추진력만 있으면, 원하는 위치로의 이동이 훨씬 쉬워진다.
노예가 유한계급이 되는 과정이 이것과 다를 것이 없다.
독자 여러분이 이 글을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판단을 내리며, 실제 자신의 삶에 적용할 것인지 말것인지는 침해할 수 없는 개개인의 권리이며 책임이기도 하다. 나는 표본과 통계, 관찰과 사색을 통해 세상의 사실을 정리정돈하고 논리와 이성에 기반하여 차근차근 건설한 메커니즘을 제공해본 것이다.
이것이 마음에 들수도, 안들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관이다.
나는 작가로서 이러한 글을 계속해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공동체를 위한 미덕을 행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