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은 수집광, 그리고 커피광
꼬불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 길 끝엔 뭐가 있을까, 작은 기대와 약간의 낯섦이 뒤섞인 채로.
오후 햇살은 차창 너머 나뭇잎을 부드럽게 스치고,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느슨해지게 만들었다. 공주에서 돌아오던 날, 집으로 곧장 향하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어쩐지 오늘 하루가 이대로 끝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다 우연히 지도 속 조그맣게 찍힌 '은구비 로스팅 팩토리'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방향을 틀었다. 집에 가는 길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마음도 삐딱하게 틀어진 날이었으니까. '이때 아니면 언제 가보겠어' 하고 스스로에게 말한 뒤, 조금은 뻔뻔한 얼굴로 핸들을 꺾었다.
길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카페는, 마치 숲이 품고 있는 작은 아지트 같았다. 본관과 별관이 나란히 이어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나무와 풀들이 고요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이런 곳이 진짜 있을 줄이야. 괜히 혼자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장수가 있다. 해가 지고나면 리어카에 고동색 드럼통을 올리고 불을 짚혔던 군고구마 장수 말이다. 별관에 세워진 높고 긴 굴뚝을 보니 갑자기 그 향이 스쳤다. 추운 겨울 바람을 이겨낼 수 있었던 그 단맛과 불길에 그을려진 껍질의 맛은 커피와 닮아 있었다.
지하에 쌓인 생두들. 유명한 맥주 공장을 견학하는 구경꾼처럼 콩이 볶아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예전, 아주 잠깐 로스팅을 해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느꼈던 뜨거운 열기와 구수한 냄새, 덜 볶인 콩의 향까지. 잊혀졌던 기억들이 하나둘 살아나고 있었다.
본관으로 들어서면 수집품들이 눈길을 끈다. 철제 기구들, 오래된 전화기, 어쩌면 누군가의 기억이었을 물건들이 이 공간에 모여, 조용히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어떤 소품은 정말 소장하고 싶을 만큼 예뻤고, 어떤 것은 어디에서 왔을지 궁금해졌다.
카운터 앞에 서서 메뉴판을 넘기다 '페루 게이샤'라는 이름이 보였다. 가격도 괜찮았고, 오늘 같은 날엔 조금은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 했달까? 그렇게 주문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2층엔 방도 있고, 홀이 있어 그날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공간이 달라질 것 같았다. 나는 중앙에 놓인 큰 테이블에 앉아 마치 카페 전체를 나를 위해 빌린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보기로 했다. 그 넓은 테이블에 커피 한 잔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꽉 채우는 느낌이었다.
따뜻할 때는 체리 같은 산미가 스치듯 지나가고, 식어갈수록 고소함과 쌉싸름함이 묵직하게 자리 잡는다. 마지막엔 바디감이 살아나면서 전체적인 밸런스가 좋아졌다. 밀크 초콜릿 같은 은은한 단맛도 느껴졌고 한 잔의 커피가 보여주는 변화의 흐름이 참 흥미로왔다. 문득, 얼음 바스켓에 컵을 담가 바스푼으로 돌리는 상상을 해봤다. 그 온도의 변화를 맞이하는 커피는 또 어떤 맛을 보여 줄까? 커피도 사람처럼, 온도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니까.
이곳을 둘러보면 이곳 사장님의 수집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래된 물건들이 하나도 낡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다양한 가방들을 보며 궁금해졌다. 어떤 계기로 이 많은 가방들을 모으게 되셨을까? 어쩌면 하나하나에 사연이 있고, 여행이 있고, 그리움이 있을지도.
소품을 보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소품을 보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무도 없는 평일의 오후, 이 여유로움이 내 마음을 천천히 덮어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가끔, 전혀 계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 때가 있다고. 그렇게 마주친 우연들이 마음을 흔들고, 기억이 되는 거라고.
은구비 로스팅 팩토리. 이름처럼, 은근히 구비구비 이어져 마음 속 어딘가에 작은 흔적을 남기길.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도 말 없이도 오래 남는 그런 공간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