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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05. 2021

김누누의  「합평의 제왕과 교수가 죽은 다음의 술자리」


 



교수의 사망 소식을 처음 들은 합제는 

 내가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했다

 합제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고     


 합제의 친구들은 합제의 시를 좋아하던 교수가 죽어서 합제가 슬퍼하는 줄로만 알고 있다

 맞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프겠니

 친구들은 합제를 위로해 주려고 커피도 사 주고 케이크도 사 주고 밥도 사 주고 술도 사 줬다

 그래서 합제는 내가 교수를 죽였어야 했는데 엄한 데서 객사했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친구들은 술에 취하기 시작했고

 그거 잘 죽었지 잘 죽었어

 합제의 눈치를 보느라 꺼내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합제는 조용히 친구들이 계산할 안주를 집어먹기만 했다 

 잘 죽었는지를 시작으로 친구들은 앞다투어 주머니에서 교수 욕을 꺼냈다

 술자리는 삽시간에 죽은 교수 욕 경연 대회가 되었다    

 

 교수 새끼 잘 죽었다

 진작 죽었어야 해 그 새끼는 

 이제야 죽은 게 얼마나 억울한지

 나쁜 새끼

 못된 새끼

 교수 새끼

 야 짠해      


 짠!     


 교수 새끼

 나쁜 새끼

 죽일 놈의 새끼      


 합제는 가만히 친구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듣고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니라고! 내가 죽였어야 했는데 못 죽였다고! 내가 죽였어야 돼 내가! 거기서 그렇게 죽으면 안 됐다고!

 어헝헝

 합제는 테이블에 엎드려 울기 시작하고 

 머리카락이 국물 닭발 냄비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영문도 모르고 합제야 괜찮아? 합제야 미안해 우리가 말이 심했지 미안해 네가 교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어 미안해 합제야 미안해 울지마 합제야 

 미안해 합제야

 합제야 미안해    

 

 합제라고 부르지마 진짜 싫어 이름으로 부르라고 이름으로

 합제는 울면서 속으로는 또 과거로 돌아가게 될까 걱정했다     


 (합평의 제왕과 밝혀지는 진실 편으로 이어집니다)            



                                                                    합평의 제왕과 교수가 죽은 다음의 술자리」전문 







합평(合評)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비평”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는 어떤 글을 비평하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짐작하듯이 자신이 써온 글을 합평받고 동료들이 써온 글을 합평해 준다. 이 시는 이런 소재로 작성되었다. 그렇다면 합제는 무엇인가. 합제는 “합평의 제왕”(「합평의 제왕과 모난 돌을 쥔 사람」)을 일컫는다. 풀어서 말해 합평회 장에게 시를 잘 쓴다고 칭찬받는 사람을 합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합제는 이 시에서 무슨 이유로 조롱받고 있는 것일까. 이름을 불러 달라고 말하는 합제에게 화자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합제’라고 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 입장에서 이 시를 읽으며 단순히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치부하면 안 될 것 같다. 김누누의 또 다른 시 「합평에서 살아남기」를 읽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는 합평하는 공간을 단순히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행위에 대해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시는 문학이라는 뾰족한 ‘뼈’을 숨기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문학은 무엇인가. ‘교수’라는 상징적 기표는 무엇인가. 칭찬을 받는 것이 좋은 문학인가. 문학적 잣대는 늘 항상 변하기 때문에 시대의 부산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무의식적인 장 안에서 그때 그 순간의 상황에 따라 기준이 정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합평회에서 들은 ‘칭찬’을 정말로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이 시가 문학이 무엇인지 우리들에게 묻게 해주는 시처럼 느껴진다. 과거로 돌아가 우리들의 자화상을 스스로 쳐다보게 해주는 것 같다. 그의 시가 이런 효과가 있다면 이 작품은 일정 부분 시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예전에 어느 한 시인이 갈색 시집을 두고 시집이 아니라고 내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왜 이런 시집을 읽느냐고 문학을 공부하는 내게 핀잔을 준 것이다. 나는 창피해서 시집을 덮었다. 그때는 내 문학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좋다고 하면 쫓아다녔던 부끄러웠던 시절. 아무튼 그가 보기에 시가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한 참 흘러 그는 자신의 문학관이 많이 바뀌었다고 내게 고백했다. 과거 자신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시인도 자신 안에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기에 성장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질투하며 성장한다. 이 시인이 시집이 아니라고 말했던 갈색 시집은 최근에 50쇄를 찍었다. 한 시인에게도 문학적인 잣대는 여러 번 바뀐다. 문학이 쉽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누누의 ‘합평’ 연작시는 ‘문학’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한다. 원론적인 문제를 ‘합평회’라는 공간을 경유해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하게 느껴진다. 이 뜨거운 감정을 독자들에게 전달했으면 누누의 시는 좋은 시이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김누누합평의 제왕과 교수가 죽은 다음의 술자리착각물파란, 2020, 42~44

* 김누누 시인: 1991년에 태어났다. 2014년까지 김보섭으로 활동하다가, 2014년부터 김누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19년 독립문예지 <베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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