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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09. 2021

김효선  시인의  「고라니의 밤」에 대한 단상







대대로 천식이 있는 집안이다 할머니는 칡 달인 물을 자주 마셨다 겨울엔 귤피에 흑설탕을 넣고 달였다 방 한 칸 부엌 하나가 전부인 단출한 세간 밤에도 불을 켜지 않았다 가끔씩 고라니가 방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나는 자주 앓아누웠다 아버지는 화를 많이 냈다 날마다 고라니가 우는 꿈을 꿨지만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그림자는 없었다     


밤마다 더러운 광장을 걸으며 허물어지는 벽을 바라보았다 물구나무서려는 코끼리와 마주치기도 했지만 못 본 채 했다 서랍에 담긴 아침을 영원히 꺼내고 싶지 않았다 천사는 귀가 얇았고 자주 마음을 들켜서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아흔 살의 아침은 어떤 기분일까 쪼그라들 외로움도 없이 눈을 뜰까 아흔 넷에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담배를 끊었고 풍선처럼 조금씩 줄어든다 여전히 마당 한구석 들풀처럼 앉아 있는 할머니 나도 멍하니 앉아 볕을 세는 일이 많아졌다 아무 일 없이 쓸쓸해지고 싶었다     


대대로 천식이 있는 집안이다 발신도 수신도 없는 날 어디선가 컥컥거리는 소리가 이명처럼     

      


                                                                                                 「고라니의 밤」 전문



할머니는 오래도록 천식을 앓았나 보다. 오래도록 기침을 했다. 화자는 그래서 할머니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기침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작은 체구에 굽은 허리. 작은 보폭으로 길을 걸었던 할머니는 고라니를 닮기도 했다. 할머니는 방 한 칸에 부엌 하나가 전부인 집에 살았다. 그곳에서 절약하고 아끼며 성실하게 사셨다. 할머니가 불을 켜지 않고 방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고라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처럼 느낀 것은 할머니의 고독 때문일까. 외로움 때문일까. 허탈함 때문일까. 이런 할머니가 싫었나 보다. 화자의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조금은 더 좋은 환경에서 편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아버지의 ‘화(火)’로 투영되었다. 할머니의 끝은 쓸쓸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한 번도 닿지 못한 아흔 살의 아침을 헤아린다. 그 아침은 외로움마저도 말라버린 상태일까. 아흔의 아침을 손쉽게 경험할 수 없다. 허탈함과 무모함이 짙게 다가오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시간에 홀로 서 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는 아흔넷에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이런 할머니를 보고 많이 아프셨나 보다. 담배를 끊었고 체중도 많이 줄었다. 무엇보다도 화자는 더 이상 할머니를 만져볼 수 없다는 마음에 가슴이 아프다. 정서의 관성 때문일까. 할머니와 보낸 추억이 내 가슴을 스쳐 할머니와 함께 앉아 나란히 볕을 세기도 한다. 하지만 이 행위는 내가 할머니를 닮아가는 것일 뿐, 곁에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아무 일 없이 쓸쓸해지고” 싶을 뿐이다. 화자의 집안은 “대대로 천식이 있는 집안”이니, 화자의 아버지도 화자인 나도 올라오는 기침을 막을 수 없다. 지독한 유전이다. 가족들이 컥컥거릴 때마다 할머니의 흔적도 함께 흘러나온다. 


허물어진 벽을 보고나, 못 본 채 뒤로 물러서거나, 서랍에 담긴 아침을 꺼내지 못하는 행위나, 마음이 들켜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는 화자의 모습은 생전에 할머니에게 살갑게 다가가지 못했던 흔적으로 느껴진다. 내게 할머니는 어떤 존재일까. 삶의 끝에 서 있는 한 사람의 고독은 무엇일까. 고독이 말라갈 정도로 모두 타버린 고독을 체험하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나게 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김효선의 「고라니의 밤」이다. 



 * 김효선고라니의 밤문학청춘』 46, 문학청춘, 2020, 193.   

 김효선시인: 1972년 제주 대정읍 출생, 2004년 리토피아』 등단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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