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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07. 2021

김지민   시인의 「감염」에 대한 단상







 그는 상의와 하의 그리고 양말을 차례로 벗는다. 그는 순조롭게 나체가 되고 그 모든 과정을 내게 등 돌려 진행한다. 그의 수그린 등짝에는 정체 모를 검은 원들이 진을 치고 있다. 놀라지 마세요. 문신이에요.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돌아선다. 검은 원들은 예측할 수 없는 패턴으로 그의 거죽을 이루고 있다. 나는 그가 병에 걸린 타조 같다고 생각한다. 

 검은 원들은 일정하지 않다. 어떤 원은 옅은 회색을, 어떤 원은 윤이 나는 먹색을 띠고 있다. 저마다 다른 시간대에 속해 있는 것 같다.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대체로 유사하여 나의 눈에는 그것들이 그의 몸에 서식하는 하나의 개체군으로 보인다. 그는 나에게 키스하지만 나는 그의 혀에 있을지도 모를 검은 원을 살피느라 집중할 수 없다. 이게 대체 뭐죠? 

 그는 검은 원 하나하나 저마다 사연이 있다고 한다. 원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원에 담긴 사연을 말해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도 그런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반발심과 호기심이 거의 동시에 들어 나는 잠자코 있다. 그가 의미 불명의 문신을 이용해 사람의 환심을 사는 타입이라면 머잖아 자기 입으로 모든 것을 술술 불게 될 것이다. 

  나는 그의 가슴팍 한가운데 유난히 크고 검은 원을 쓸어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은 원들은 부지런히 늘어나고 또 늘어질 것이다. 언젠가 그는 병충해에 신음하는 고목 같겠다. 불쌍한 사람. 그는 가슴팍을 맴도는 나의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별안간 검은 원들이 내게 일제히 올라탄다. 검은 원들이 나를 짓이기고 한꺼번에 밀려든다. 

  그의 옆구리에서 조심히 빠져나온다.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살피지만, 거울 속의 나는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희다. 그는 침대에 널브러져 빛을 부분적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검은 원을 긁적이며 빛을 등지고 눕는다. 별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병든 타조 같다. 옷가지를 챙겨 입고 방을 나선다. 문을 닫고 돌아서자 나는 부분적으로 지워진다.      


                                                                                      「감염」 전문






사랑과 관련된 무수히 많은 작품을 떠올려 보면 동일한 형태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 시를 만나게 되면 우선 멈추게 된다. 나의 사랑과 이 사람의 사랑은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 보고 나의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점검해 보게 된다. 사랑 말고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렇다면 「감염」에서 화자는 어떤 사랑을 노래하는가.


「감염」의 화자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것 같다. 당신의 몸속에 그려진 검은 흔적을 화자는 작은 손으로 쓰다듬고 당신 가슴에 머리를 기대지만 화자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한다. 당신 몸에 새겨진 검은 원의 사연에 대해 모르는 척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해하는데 그 이유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당신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당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화자는 당신에 대한 파편을 다음과 같이 옮겨 놓는다. “병에 걸린 타조”와 닮았다는 것과 “병충해에 신음하는 고목”을 닮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당신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명명한다. 화자의 말처럼 당신은 정말로 불쌍한 사람일까. 당신의 몸속에 새겨진 검은 문신들은 화자의 손가락을 타고 번지려는 찰나, 화자는 당신의 옆구리에서 빠져나온다. 시의 제목처럼 감염되기 직전에 벗어나게 된 것이다. 시인은 사랑의 조각을 이런 식으로 흘려 놓는다. 


시인은 코로나-19의 시의성을 반영하기 위해 ‘감염’이라는 제목을 빌려와 ‘화자’와 ‘나’와의 관계를 다루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감염’이라는 단어마저도 ‘나’와 ‘당신’과의 관계로 번지게 하는 시인의 시선(目)일 것이다. 감염은 단순한 내용물일 뿐, 이 시인의 시선은 사랑하는 당신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말로도 읽을 수 있다. 이 한편만을 읽고 김지민 시인의 예술을 판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예술에는 ‘나’와 ‘당신’과의 호흡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 같은 예견을 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몽상일까. 김지민 시인의 다른 작품들을 기다리게 된다. 그녀가 그려낸 ‘관계’의 수사학이 궁금하다. 



 * 김지민감염」 현대시』 11월호한국문연, 2020, 35

 * 김지민 시인: 2020년도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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