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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pr 17. 2022

‘구찌(GUCCI)’한 만화



이 시대의 대세 콘텐츠는 웹툰이다. 웹툰에 ‘대세大勢’라는 단어가 붙었으니 이 매체에 핫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달라붙는다. 자본과 기술도 그중에 하나다. 최근에는 AI 기능이 웹툰에 침투하고 있으니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어 창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만화를 흥미롭게 여겼던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웹툰 현장에 대거 뛰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극단적으로 표현해 2022년 이후의 만화가들에게는 그림 그리는 감각이나 스킬이 덜 중요해진 것이다. 이처럼 ‘기술’은 우리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교환 불가능한 ‘결’을 무시할 수 없다. 고유한 붓 터치와 색 조합을 섬세하게 구사할 줄 아는 만화가들이 이곳에 존재하는 한, 그들의 ‘멋’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공장에서 기계의 도움을 받아 구두나 양복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보다 수제 작업이 더 값지게 다가오는 것처럼, 만화의 영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의 흐름이기에 기술의 침투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기술로 인해 막대한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만화가들만의 독특한 ‘선’과 ‘결’을 잃으면 안 된다. 이것을 잃으면 탄탄한 뿌리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런 몽상 중에 무명 예술가의 삶을 다루고 있는 최다혜의 그래픽 노블 『아무렇지 않다』(2022)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기술과 맞설 수 있는 든든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명 예술가의 삶은 작가 탄생 서사와 닮아 있어 매력적이다. 초록뱀의 『그림 그리는 일』(2020)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최다혜 버전은 또 다르다. 이대미의 『비우』(2016)나 박윤선의 『수영장의 냄새』(2019)처럼 한국판 그래픽 노블의 ‘구찌’를 보는 것 같다.


이 책의 그림은 섬세하고 멋스럽다. 섬세한 그림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으니 책을 읽는 독자는 눈을 호강할 수밖에 없다. 작가의 계획된 그림과 마주할 때면 ‘나’를 쳐다보게 된다. 구두를 그린 처음과 끝 장면이 그랬고, 얼굴을 숙여야 했던 발그레한 볼을 그린 장면이 그랬다.   


무엇보다 최다혜는 무명작가로서 살아가며 느낄 수밖에 없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말풍선 없이 여백의 형태로 잘 담아낸다. 버티기 힘든 현실과 왜곡된 편견으로부터 ‘긍지’를 지키려는 당당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을 통해 여성의 삶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리얼리스트들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역할이란 동시대를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증언”하는 것이라면 최다혜는 이 텍스트를 통해 ‘나’를 발화함으로써 예술가들의 보편에 관해 이야기한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동시대의 담론으로써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도 동료들은 당신에게 고마워 할 것이다.   


그러나 내용이 표면적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싱겁다. ‘최다혜’표 그래픽 노블이 유머나 재치의 방식으로 그려지는 것은 어떨까. 이 방식이 아니라면 새로운 방식으로 리얼리즘을 정의해 보는 것은 어떨까. 조금씩은 새로운 것을 모험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짓궂은 몽상보다도 봄날의 문턱에서 최다혜라는 새로운 표정을 만나서 반갑다. 후속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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