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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y 05. 2022

저녁을 옮겨 적는 일

문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문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저녁을 옮겨 적는 일 



                                                         “후회 없는 시를 쓰며 낄낄거리다가 혼자 무서워지는 저녁입니다”




여기 “사막 같은 가난”(「헛간에 불을 놓다」)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 장례식장에 찾아가선 자신의 신발 하나 돌보지 못한 채, 눈치 보며 방황하는 시인이 있다. 그런 자신을 시 쓰기와 연동해 시 한 편 지어내는 ‘찐’ 시인이 있다. 그래서 그가 걸어 다니는 공간은 온통 시적인 삶으로 채워진다. 어디를 가든 당신은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고 기록한다. “낄낄거리는 군산”(「군산」)의 표정을 놓치지 않은 것도, 외출을 위해 바지를 입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씻고/ 펴서 말려/ 차곡차곡 숨을 넣고 주름을 잡고 품을 살피는 일이/ 세련”(「세련」)이라고 배웠기에, 바지를 고를 때마다 ‘나’와 ‘문학’이 세련될 수 있는지 고민한다.   


삶 속에서 시가 재생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디즈가 온몸이 성감대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대상을 향해 감각이 열려 있으니 어떻게 외면하랴. 시인의 숙명이다. 그런데 변수는 당신의 ‘삶’이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같지 않기 때문에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게 출판되고 복간된다. 따라서 우리는 애써 쓴 고백에 대해 의무적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문학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진정한’이라는 라벨이 붙을 수 있는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문신 시인의 세 번째 시집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고 무엇을 경험해야 하는가. 그것은 ‘저녁’이라는 시공간에서 시를 길어오는 시인의 모습이다.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시인 문신의 시집을 펼쳐 본 독자들은 이 질문을 피해 갈 수 없을 것 같다. 1부에 펼쳐진 시편 중, 일부의 작품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작품들이 저녁을 소재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1부에 쏠린 이 에너지는 시집 끝까지 이어진다. 시인은 무슨 이유로 저녁 주변을 서성거렸던 것일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녁에 홀로 남겨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연이 있다면 무슨 사연으로 저녁을 움켜 쥔 채, 놓지 못했던 것일까. 그에게 ‘저녁’은 무엇이며 이 개념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저녁’을 이해하면 시인의 얼굴을 만질 수 있을까. 


문신 시인은 ‘저녁’에 놓인 자신의 모습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저녁에 일어날 수 있는 경험을 하나에서 열까지 자신만의 호흡으로 ‘저녁’의 흔적들을 펼쳐 보인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저녁’을 펼쳐 놓는 방식이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개별적인 살갗이 피어낸 저녁의 흔적을 쳐다보며 ‘나’와는 전혀 다른 혹은 나와 일정 부분 비슷한 당신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시 읽기의 즐거움과 관련 있다. 하지만 이 즐거움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시인이 그려낸 저녁의 풍경은 고독할 뿐만 아니라, 슬픔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낭만적인 ‘저녁’을 독자들이 기대하거나 상상했다면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한다. 적적하고 체념적인 조각만이 시집 곳곳에 흩뿌려진다.   





그러나 발목까지 젖어 드는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일은


저 감나무 잎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장을 캄캄하게 옮겨 적는 일


그런 뒤, 비 그친 감나무 잎 그늘에 낡은 의자를 내다 놓고 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캄캄한 문장을 팔팔 끓는 목청으로 읊어대는 일

                

                                          「저녁 공부」 부분 




짙고 두꺼운 감나무 잎에 빗물이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해본 사람은 안다. 하나의 사건처럼 그 장면이 청각을 자극시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화자는 비가 내리는 날, 감나무 잎에 들이치는 빗줄기를 멍하니 쳐다보며 하던 일(책 읽는 일)을 멈춘다. 스스로 단단한 바위가 되어 이 날의 저녁을 무심히 관찰하고, 끝내는 책으로 이해하거나 학습하는 방식이 아닌 저녁 자체를 느껴보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다짐은 독자 입장에서 창작자의 ‘시론’을 마주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론이 무엇인가. 작가의 의지와 바람이 투영된 텍스트이지 않겠는가. 


시인은 이 방법론에 힘을 쏟는다. 시집에서 저녁의 풍경을 자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저녁’을 공부하면서 무엇을 배우고자 했던 것일까.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궁금증에 답하는 것이다. 좋은 문학이라면 어떤 방식이든지 소환될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에 조금은 상투적인 표정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저녁’이라는 키워드로 시인이 힘 있게 밀고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묵직한 형태로 알레고리allegory화 된다. 다시, 말해 ‘저녁’을 중심으로 시인이 움직였던 장면들이 거미줄처럼 진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이 시집은 화자 홀로 마당과 동네와 술집을 기웃거린 고백서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러한 발걸음이 작위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의식’적으로 저녁을 탐구했을 지라도, ‘무의식’적인 실존 덕분에 살결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그래서 연작시 형태로 보이는 의식적인 ‘저녁’ 관련 작품들이 인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의식적인 창작에 있어 이 부분은 중요하다. 


이러한 특징은 연작시가 성공적으로 배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독자들에게 당당히 자랑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그가 그려낸 ‘저녁’ 연작시는 소소하면서 진솔하다. 가령, 시인은 “밥그릇을 비우고 흘린 밥알을 훔치고 수저를 씻어 수저통에 가지런”(「누군가 페달을 밟아대는 저녁」)히 눕히는 반복적인 일상을 통해 ‘인생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슬픔의 내력”(「슬픔을 부르는 저녁」)을 시집에 덧칠한다. 시인은 슬픔을 먹고 슬픔을 품고 슬픔을 언어로 표현한다. 





시내버스 뒤쪽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을 저녁이라고 부른들 죄가 될 리 없는 저녁이다


누가 아파도 단단히 아플 것만 같은 저녁을 보라

저녁에 아픈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기 좋은 저녁이다


시내버스 어딘가에서

훅,

울음이 터진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저녁이다


이 버스가 막다른 곳에서 돌아 나오지 못해도 좋을 저녁이다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부분 




 이 작품은 ‘저녁’을 경유하지만 ‘나’가 중심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공단 지대를 경유하는 시내버스에 눈길을 보낸다. 퇴근 시간에 어둠이 밀려들어오는 것처럼, 버스에 승차하려는 사람들도 민물처럼 버스 뒤쪽으로 차오른다. 화자는 이러한 풍경을 관찰하며 “그들의 저녁”에 대해 생각하고 여러 상념에 빠진다. 상념에 가속이 붙게 된 것은 지인이 아프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중년1)의 삶은 이렇게 끝을 쳐다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화자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적적함 감정을 품고 저녁을 경유해 독자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창작자의 시론을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문신 시인의 시집을 읽은 독자들은 시집에 그려진 ‘저녁’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만져 볼 수 있다. 독자들 또한 자신의 저녁과 견주며 ‘나’의 저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좋을 듯하다. 궁극적으로는 시인이 했던 방식과 동일하게 ‘나는 누군인가’ 혹은 ‘나는 잘 살고 있는가’와 같은 건강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것이 문신 시인의 시집을 탐닉하는 하나의 핵심 포인트다. 독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의 역할이지 아니겠는가. 


하지만 유독 이 시집에서는 ‘저녁’에 대한 관성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1부에 저녁 관련 텍스트들이 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젓한 흔적들은 지워지지 않은 채, 흐르고 밀리고 번져 지속적으로 쌓이고 축적된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가 탐구한 ‘저녁’ 개념이 매우 실존적인 맥락에서 재생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그가 골몰했던 저녁의 파편들을 재차 쫓아가 좀 더 자세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저녁’은 무엇이기에 이토록 변주의 모습을 취하게 되는 것일까. 


이 시집 2부에 수록된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에서 화자는 앵두나무 주변을 서성거리며 앵두를 관찰한다. 앵두나무는 3월 초나 4월 초에 꽃을 피운 후, 5월에 착색하여 6월 초에 과실이 열리는 나무이다. 화자는 봄과 여름 사이에서 앵두나무 주변을 맴돌며 앵두를 물들였던 나무가 아니라 “앵두를 물들이던 붉은 저녁”에 대해 생각한다. 과학적인 흐름을 재배치한 것으로 시인에게 ‘저녁2)’이라는 시공간이 강력하게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 저녁 자체가 우리를 숙연肅然하게 만드는 것일까. 시인은 무슨 이유로 ‘저녁’에 붙들리고 있는 것일까.  


「11, May」도 마찬가지다. 화자는 “저물녘”에 강변을 따라 산책한다. 강변을 걷고 걷는다. “강물의 속도를 가늠해보며” 맞춰 걷는다. 강변을 산책하며 이런 저런 상념에 빠진 화자는 환유의 방식으로 여러 감정을 뱉어낸다. 그리고선 저녁과 천천히 마주한다. “이어폰을 꼽은 귓바퀴를 따라 노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저녁이 올 때까지 오랜 시간 시인이 산책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산책을 한다는 것은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의 존재를 묻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걷고 걸으면서 그는 삶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고민했을 것이다. 늙은 상수리가 기우는 것을 보며 “마른 소리”(「정유丁酉, 8월 17일」)를 들을 수 있는 감각 있는 시인은 무슨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저녁’ 속에 흘러가도록 놔둔 것일까. 




그들이 옳았다

신발들은 자기들이 어떤 불운을 이끌고 왔는지 관심 없다


한걸음

한걸음

뒤축 무너진 점괘를 밟으며 저녁은 스밀 뿐 


어둠은 하염없이 돋아나는 권태가 되기에 손색없다 


                                    「예보―권태」 부분 




위의 작품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 시는 의자에 앉아서 먹는 것이 아닌, 좌식坐式을 이용해 먹는 삼겹살집 식당 풍경을 다룬다. 손님들 모두 신발을 아무렇게 벗어놓고 맛있게 정신없이 “지나온 날들을 난도”질 하며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 하지만 화자는 가지런하지 않은 그들의 신발을 바라보며 “내일의 점괘”를 확인한다. 중요한 것은 화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삶은, 생은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신발들은 자기들이 어떤 불운을 이끌고 왔는지 관심”이 없다. 뒤축 닿은 신발에 삶이 축적되는 것처럼, 화장지가 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저녁과 삶과 불운한 일상은 의식되지 못한 채 쌓일 뿐이다. 


먹고 자고 다시 일어나고, 다시 먹는 이러한 반복의 여정을 우리는 조심스럽게 ‘권태’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들은 문신 시인의 작품에 우울과 슬픔이 스미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부제를 통해 화가 이중섭의 작품을 응시한 것도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현재 권태와 마주하고 있다. 그는 권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쓸쓸한 표정을 검은 비닐봉지에 하나 둘 주어 담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인의 삶이 권태로 인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사흘이고 열흘이고 시를 새김질하다가 살구나무에 계절이 걸리는 것도 잊고 또 시를 읽을 것이다 그렇게 시를 읽다가 살구꽃 터지는 날을 골라 내 눈에도 환장하게 핏줄 터지고 말 것이다 


                                              「시 읽는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를」 부분 




그는 ‘쓰기’를 통해 권태의 삶을 두 손으로, 작은 몸으로, 버티고 서 있다. 눈에 핏줄이 터져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은 문학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을 느끼게 해 준다. 어찌하든 간에 삶은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지친 ‘나’를 일으켜 세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화자는 어금니를 발치한 날에도 그날의 기분과 감정을 시로 옮겨 적고, “가을 기운”(「오후」)이 넘실대는 날, 빨래한 경험을 시로 적는다. 


여기서 빨래는 중요한데, 그 이유는 빨래야말로 반복되는 일상의 흔적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인은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재생되는 빨래를 “습속”(「습속」)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습속을 피하지 않고 전면에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늘 항상 그렇지만 가능성은 밖에 있지 않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희망은 꿈틀거린다. 따라서 독자들은 재미나 위트나 농담 같은 표현을 문신 시인의 세 번째 시집에서 기대하면 안 된다. 진지한 화자의 삶이 주로 부각된다. 




당신의 발목에서 그늘이 자란다는 소식으로 불면하는 저녁

일흔을 목전에 두고도 그늘 한 점 없는 발목을 자책하다가 

간신히 그릇을 바로 돌려놓습니다

당신의 발목 같아서 그릇 가득 밥을 담아봅니다

당신 없는 세상에서 먹는 첫 밥이

뜨거운 그늘처럼 목에 얹혀 단단하게 마디 지는 저녁입니다


                                      「저녁 노래」 부분




위의 작품은 당신을 닮은 ‘발목’에 대해 생각하며 쓴 작품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울음이 아닌 울음을 선사한다. 시인은 어느 날,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를 느끼고 그의 가느다란 발목을 떠올리며 나의 발목과, 밥상에 올라가 있는 오목한 밥그릇의 선(발목)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밥 한 끼 뜬다. 밥이 잘 넘어갈 리 없지만, 밥을 뜨면서 저녁에 놓인 ‘나’를 힘차게 삶 속으로 민다. 


문신 시인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긴장의 끝을 놓지 않고 시작詩作을 이행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집을 “저녁을 옮겨 적는 일”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저녁은 오늘도 내일도 먼 훗날에도 찾아오는 짙은 먹구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먹구름은 우리에게 ‘나’의 존재를 묻게 한다.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저녁이 밀려올 테니, 시인의 저녁과 당신의 저녁을 동시에 만나보기 바란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당신의 저녁은 어떠한가? 당신의 저녁은 안녕한가?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1) 문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곁을 주는 일』에서는 「마흔 살」, 「중년의 번식」, 「우연한 중년」, 「걸어 다니는 중년」, 「중년의 내일」, 「중년 무렵」 등의 작품을 찾을 수 있다. 두 번째 시집이 출간된 2016년 당시, 시인은 끝에서 세상을 쳐다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6년 후, 출간된 이 시집에서는 그 힘이 더 강력해졌으리라 추측된다. 박성준 시인은 두 번째 시집 해설에서 “여기 너무 일찍 늙어버린 시인이 있다.”(박성준, 「네 번쯤 놀람을 유발하는 이상한 중년(들)」, 『곁을 주는 일』, 모악, 2016, 108쪽.)라고 적었는데, 이 문장도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2) 문신 시인의 첫 번째 시집에서는 「저물녘」이라는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저물녘의 풍경을 다양한 기분과 이미지로 층을 쌓은 작품인데, 이 작품 말미에 시인은 “아무튼 저물녘이란 고요함만으로는 견딜 수 없는 발광의 순간이라고만 해 두자”(문신, 「저물녘」, 『물가죽 북』, 도서출판 애지, 2008, 19쪽.)라고 적었다. 사후적인 발언이 되겠지만, 시인에게 저녁은 다채로운 형태로 가슴 속 깊이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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