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종필 Feb 13. 2023

하루 정도 결석해도 딱히 인생에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을

고형주의 『여름방학의 끝에서』(2020)


기력한 삶이 지속되고 있다. 읽어야 할 책들과 써야 할 것들을 놔두고 이렇게 태평하게 지내고 있다. 이럴 때는 만화를 읽어야 한다. 만화를 읽으면 무엇인가 잠시 도피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피할 수 있는 대상이 ‘만화’라는 것이 신기하지만 사실이다. 한때는 그 대상이 영화였고 미술이었지만 이제는 ‘만화’인 것이다. 내 전공은 문학인데, 문학으로 도피하지 못하고 이렇게 다른 대상을 찾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진정한 문학을 찾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게을러서 문학을 응시하지 못해서일까. 다시 꾸준히 격주로 문학 읽기를 시작했고, 다가올 수업에도 동시대 비평으로 모두 채워 넣었다. 무의식적으로 다시 치열하게 문학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이제는 가슴 뛰지 않는다. 시시콜콜한 문학을 응시하며 지내는 것이 이제는 지겹다. 하지만 이 지겨움 속에서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읽고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아니다. 써야 한다. 아니다. ‘써야 한다’가 정답은 아니다. 무엇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문종필의 오늘 만화] 14화에 소개할 만화는 만화가 고형주의 『여름방학의 끝에서』(2020)이다. 요즘 삐약삐약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을 리뷰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지역’과 관련된 장편의 글을 쓰기 위함이다. 이 과정을 생동감 있게 적어 내려가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 작업에 힘내고 있다. 그래서 당분간 청탁받은 글을 제외하고 ‘지역의 사생활99’로 채울 생각이다. 분량도 짧고 생각할 것들도 여럿 제공해 주니 무의미한 작업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경원’과 ‘지현’ 두 인물을 다루는 『여름방학의 끝에서』는 순간의 소중함을 다룬다. 어린 시절 지현은 몹시 아팠다. 학창 시절을 온전히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적한 충주의 어느 한 마을에 머물게 된다. 지현의 부모님과 친분이 있었던 경원의 가족은 이런 사연으로 인해 충주에 들리게 되고 이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작품에서 지역 ‘충주’는 그렇게 적힌다.






지현아 경원이 간다. 인사해야지.


경원은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충주에 가는 것이 쉽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 경원이가 지현이를 만나러 가는 것은 여행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지현이에게는 이벤트다. 여행은 말 그대로 쉬러 가는 것이니 부담이 없다. 하지만 이벤트는 여행과는 다르다. 이벤트는 하나의 ‘사건’이다. 능동적인 것보다도 수동적인 형태로 다가오는 큰 표정이다. 그렇기에 경원은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현이게는 특별하다.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만난 지현은 경원에게 모든 음식값과 여가 비용을 지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베프가 여기까지 놀러와 줬는데 뭐라도 사주고 싶다구.


하지만 ‘베프’는 지현에게만 해당되는 단어였다. 경원은 지현을 베프로 생각한 적이 없다. 이런 감정의 균열이 이 만화를 힘껏 끌고 간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큰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지현의 집에 놀러 온 경원이 서로 다른 방에서 각자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외롭고 고독한 지현이 동의 없이 경원의 방에 몰래 들어와 잠을 청한 것이다. 고등학생인 두 친구가 한 방에 같이 자는 것이 큰 문제가 없지만, 베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경원은 지현의 태도에 불만을 느낀다. 경원을 끌어안으며 지현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경원아 하루만 더 있다가 가면 안돼?



그러자 경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놀라긴 했지만 다시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건 힘들지 당장 내일모래 학원도 가야하구


여기서부터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야.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하자 안도감이 들었다. 오늘 지현이와 자전거를 타고 나서부터 내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을 경원은 고등학교 2학년 때라고 고백한다. 의지할 친구가 경원밖에 없던 지현의 부탁을 거절한 경원은 그날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지현이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을 더욱더 잊을 수 없다.


홀로 자전거를 탔다는 것은 오래전에 경원과 함께한 추억을 상기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니 말이다. 지현은 경원을 오래도록 가슴에 품었던 것이다. 이런 사연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경원은 후회한다. 이 만화는 이 감정을 오래도록 품는다. 그래서 경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그날 하루 정도 결석해도 딱히 인생에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어쩌면 이 만화에서 나는 이 문장을 건지기 위해 읽었는지 모르겠다. 읽어야 할 텍스트들과 해야 할 것들, 계획한 일들을 잠시 내려놓고 쉬어도 될 수 있는 여유를 배운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조금 쉰다고 해서 인생에 큰 지장이 없다는 웃픈 감정도 배우게 된다. 이 만화는 우리들에게 삶에서 소중한 ‘여유’를 선물해 준다. 만화가 고형주를 기억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휴교령이 떨어진 ‘울산’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