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에게 추천을 받았다. "언니, SF소설 좋아해? 배명훈 작가 소설 읽어봐."
가장 유명한 <타워>부터 읽어볼까 하다 이 책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심령학? 여름엔 유령이지!' 단순한 생각으로 충동적으로 빌린 책.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기까지도 '심령'이란 단어에 꽂혀 지인이 과학소설 작가를 추천해줬단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고고심령학'이란 '고고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심령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역사 연구의 끊어진 고리를 연구해주는 학문'이라 소개돼 있다. 혼령 관찰을 통해 시대를 연구한다니. 독특한 발상만큼이나 소설의 내용도 흥미롭다.
한국고고심령학계의 대표 인물인 문인지 박사가 죽고 그의 제자 조은수가 스승의 서재를 지도화한다. 그러던 중 서울 한복판에 검은 성벽이 출현하고, 조은수가 이 심령현상의 비밀을 밝혀가는 이야기다.
은수는 그 길 쪽으로 발을 돌렸다. 다른 데였으면 감히 발을 디디지 않았을 것이다. 은수는 아무도 밟지 않는 새 눈길을 거리낌 없이 밟고 지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p.10)
'고고심령학'이란 독특한 소재와 원인불명 현상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은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에 빠져들게 되는 요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직 독자와 등장인물의 사이가 데면데면한 이야기 초반, 눈앞에 그림을 그려주는 듯 보여주는 작가의 섬세하고 세밀한 인물 묘사는 마치 내 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몰입하게 만든다.
신들의 노여움이 하늘을 움켜쥐었다. 굳은 표정으로 검게 물든 하늘이, 전에 본 적 없던 이상한 것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이었다. 신들이 남기신 육각형의 작은 문자였다. 그 전장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저주의 판결문이었다. (p.273)
서울 한복판에 30m가 넘는 거대한 검은 성벽이 나타나도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똑같은 일상을 지낸다. 문득 저 성벽의 너머의 세상이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