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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자 (數抛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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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수학 포기자’를 줄여 이르는 말.
고등학생 10명 중 6명은 이른바 ‘수포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놀랍다. 신조어로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다니. 그렇다. 난 수포자였다. 차별화를 두기 위해 '원조(元祖) 수포자' 라고 해두자.
그래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백점도 받았던 것 같은데, 중학교에 들어가서 조금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집합 부분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 때 작은언니가 어디서 들은 특급 정보를 전해줬다.
"우리나라가 일본 수학 따라가기 10계년 계획이래. 어렵게 날 거야. 차라리 공부 안하는 게 나아! 그 시간에 다른 거 공부해~." 나는 이 말을 절대 잊지 못한다. 언니의 그릇된 정보로 인해 나는 수학을 고민 없이 깔끔하게 놓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안했으니 나한테 수학의 고전과 같은 정석은 졸릴 때 수건 깔고 베고 자기 좋은 베개였다. 언젠가 '수학의 정석' 모양 쿠션을 보고 얼마나 찔리던지. 그러면서 동질 의식에 조금 위로가 되기도 했다. 나만 그러건 아니었구나라는.
하지만 수학을 포기한 대가는 참혹했다. 참고로, 난 1993년까지 치러진 학력고사 거의 마지막 세대다. 수학은 점수 비율이 높아서 문제 한문제를 맞으면 4점을 획득할 수 있는데, 암기과목은 다 맞아도 고작 20점이었다. 수학을 포기한 이상 암기과목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국어, 영어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지만 암기과목은 하는 만큼 나온다 생각했다. 지리, 역사를 진짜 열심히 했다. 하지만 수학을 포기한 점수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기에 지원한 대학교는 떨어졌다. (그 당시에는 전기, 후기 지원이 있었다. 단, 후기대지원 가능 대학이 한정되어 있음) 아무 빛도 보이지 않았다. 암담했다. 수학을 못하니 재수를 한다 해도 잘할 자신이 없었고 우리집은 이미 대학생이 두 명이나 있어서 막내인 나를 재수까지 시켜 줄 여력은 없어 보였다.
"엄마, 저 그냥 취직 자리 알아볼게요..."
엄마가 무슨 말씀을 하실지 걱정이 되었지만 용기를 내어 말씀드렸다. 취직 하라고 하는 것도 섭섭할거고, 하지 말라는 것도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얘야, 너만 대학 안 나오면 형제 지간에도 무시당하게 된다. 언니 오빠 다 대학 나왔는데 너만 대학 문턱도 못 밟으면 쓰겠어?"
우리 엄마가 평소에 그렇게 따뜻하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 아니셨고 자식 뒷바라지와 생활고에 찌들어서 그냥 그래라 하실 줄 알았는데, 절대 안된다 하셨다. 엄마가 확고하게 선을 그어 주셔서 나는 다시 앉은뱅이 책상을 펼쳐 놓고 후기대 지원까지 남은 한 달 동안 진짜 열심히 공부했다. 생물을 못해서 생물 유전파트를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물론 그 때도 수학은 안했다. 다행히 후기대 중에 인천대학교 국문과를 들어갔다. 이게 내 인생에 작은 포문을 열어 주었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글을 곧잘 끄적인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국문과에 들어가니 수학을 안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1학년 때는 조금 놀았고, 2학년 때 전공파트 들어가면서 공부를 했더니 과에서 수석을 했다. 살면서 1등이란 걸 처음 해 본 나는 '나도 하면 된다' 는 자신감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참 끝이 없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출신 학교 얘기를 할 때마다 자신있게 학교 이름을 대기가 어려웠다. 서울에 있는 대학이 아니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주위에는 유난히 서강대 국문과를 나온 언니들이 많았다. 부러웠다. 내가 수학만 포기 안했어도 서울권 대학은 들어갔을텐데... 아쉬웠다. 국어는 정말 자신 있는데 우리나라 입시는 왜 수학을 꼭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과생이 왜 굳이 수학을 해야 하는거지? 늘 궁금해 했다.
그랬더니 누군가 알려 주었다. 수학은 종합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생각해보니 내 사고가 어딘가 좀 치우친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국문학 전공을 살려 대학을 졸업하고 글 쓰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국문과=굶는과는 말이 있었는데 방송 구성작가 일을 힘겹게 2년 정도 하면서 생고생을 했고, ○○저널이라는 회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마지막 회사에서는 홍보부에서 대외 홍보 및 사보 제작을 했다. 큰 아이를 낳기 전까지 10년 정도 글쓰는 일을 했다.
수포자로 살면서 그래도 나름 열심히 일했다 자부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 교육이었다. 큰 아이는 학원에서 잘 가르쳐 줘서 별 어려움이 없었다. 사교육에 철저히 의존했다. 그런데 둘째 딸아이가 문제였다. 어렸을 때 큰 애가 다녔던 놀이수학 학원을 데려갔더니 한 번 하고 나서는 "엄마 재미없어요." 하는 거다. 싫다고 해서 안 보냈다.
그렇게 초등 저학년 때까지는 숙제도 혼자서 잘 해간다 싶었는데, 초등 4학년이 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학교 수학이 하나도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였다. 4학년 때부터 도형이 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는 나도 하겠다 싶어, 문제지를 펼쳐놓고 학교 시험에 대비해 같이 풀어 나갔는데 웬걸 생각보다 어려웠다. 답안지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니 아이가 짜증을 내면서 "엄마랑 수학 안 해, 못 해!" 하는데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창피하고 속상하고, 왜 내가 수학을 안했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엄마로서 이렇게 무시당하는구나. 수학이 나를 또 무너뜨리려 하는구나...
딸아이는 자기 말로는 누구를 닮아서 선천적으로 수학 감각이 없다고, 아무리 공부해도 어려운 문제는 못 풀겠다고 했다. 그래서 수학을 안해도 된다는 예고를 어렵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미술과는 공부도 잘해야 해서 수학을 맘 편히 놓기도 힘들었다. 다 엄마 탓이니 용서해 달라 해야하나. 수학 머리를 주지 못한 죄... 고민하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딸에게 과감히 선포를 했다.
"너도 수학 포기해. 잘하는 것 열심히 하고 살기도 힘들어. 그 시간에 다른 과목 공부하는 게 좋겠어. 어차피 수학 계속 어렵게 나온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