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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설 Nov 09. 2024

# 여름 향기

에세이

여름 향기




  식탁 위 바구니에는 풋사과가 한가득 놓여 있다. 이른 아침, 창밖으로 드리운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고, 새의 지저귐이 부드럽게 이어짐과 동시에, 집안은 깊고 풍부한 사과 향으로 채워졌다. 사과 하나를 집어 들고, 그 싱그럽고 다채로운 맛을 즐기며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부는 바람에 섞여 온 사과 향기가, 한때 잊힌 추억을 가슴 한구석에서 깨워냈다. 그 향기에 이끌려 어린 시절이 스쳐 갔다. 


  초등학교 여름 방학에 가끔 외할머니댁에 갔다. 마당에는 감나무가 여러 개 있었다. 햇살이 과일의 빨간 볼을 어루만지듯, 공기 중에는 성숙한 감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큰 대봉을 따서 손주가 오면 줄려고 큰 항아리에 넣어두셨다. 그는 감이 맛있게 익어갈 무렵 감 하나를 맛보라며 건넨 그 순간, 달콤한 맛이었다. 그의 자상한 미소와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향기와 함께 어우러졌다. 그의 손을 잡고 마당을 돌며 그 순간의 소중함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일상의 바쁨과 삶의 무게에 그 추억을 잊고 살아왔다. 오래전 그날처럼 향기에 싸여 다시 한번 따뜻한 추억으로 가득 찼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잃어버린 행복의 조각을 되찾은 것처럼. 


  뜨거운 여름 엄마와 함께 시장을 갔다. 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향긋한 냄새가 코를 간질이며, 상인은 손님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각종 공예품부터 신선한 과일까지 다양한 물건이 진열되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거리 한켠에서  노인은 담소를 나누며 그들의 삶을 이어갔다. 상점마다 진열된 과일 향기가 공기 중에 한 데 어우러져 향긋했다. 둘째를 임신 중이라 입덧은 없었지만 유독 싱싱한 과일이 눈에 들어왔다. 막 따온 거봉, 대부도 포도, 맛있게 익은 복숭아, 빨갛게 익은 자두, 토마토, 사과, 주홍빛 연시를 사 왔다. 과일을 깨끗한 물로 여러 번 헹군 다음 연시를 한입에 넣었다. 연시를 입에 넣는 순간, 부드럽고 말랑한 질감이 입안 가득 퍼진다. 혀끝에 닿는 순간, 달콤한 과즙이 터지며 입안 전체에 퍼져 나간다. 그 달콤함은 설탕처럼 직설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은은하게 퍼진다. 씹을 때마다 부드러운 과육이 혀와 이 사이에서 천천히 풀어지며, 그 속에 숨어있던 감칠맛이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진다. 단순한 단맛이 아니라, 약간의 쌉쌀함과 함께 어우러져 있어 더욱 깊이 있다. 그 끝맛은 깔끔하고 상쾌하여, 한 입 먹었을 때 오래도록 지속된다. 연시의 향긋한 과일 향이 어우러져, 내 안의 싱그러운 여름이었다.


  초록이 짙은 여름 마트에서 장을 봤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 흐물거리며 들어올 때, 딸이 하나의 사과를 손에 쥐고, 그 맛을 음미했다.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사과 한입 베어 물 때마다 그 작은 순간의 행복이 얼굴에 그려졌다. 이 시간, 이 순간이 어찌 보면 하루 중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까. 해는 저물고, 야근을 마친 남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지친 하루의 끝에서, 바구니 속 마지막 사과를 손에 들고, 그 사과의 맛이 주는 달콤함과 상큼함에 조금씩 피로가 누그러졌다. 바구니는 비워지고 다시 채워졌다. 마치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변함없는 사랑과 정성이 담긴 듯했다. 


  해가 지는 시간, 세상이 금빛과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삶에 깊이 스며들었다. 밤이 깊어지고, 짙은 안개 사이로, 집안 가득 퍼진 사과 향은 가족의 따뜻함과 사랑으로 퍼졌다. 이 향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방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사과 몇 개가 갖는 단순한 기쁨이 일상의 모든 순간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처럼. 진정한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마음속 깊은 곳에 사랑과 추억의 형태로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그 사랑과 추억을 통해 언제든지 우리 자신을 다시 찾고, 삶의 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되새길 수 있다는 것을.



#책과강연 #에세이 #작가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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