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up and Wait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의 딸이 아주 어린 시절 지렁이 게임에서 연패를 하여 낙담하고 있는 아버지인 유튜버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승리에 대한 갈증 없이는 성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기술의 발견은 불편함으로부터 왔고, 발견된 기술의 고도화는 승리를 취하고 싶은 갈증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순수한 어린아이가 말하는 '다른 사람의 승리에 행복해보라'는 건, 그의 눈에는 불편함, 불쾌감, 절망을 하고 있는 아빠를 보는 게 승리를 하지 못하는 아빠를 보는 것보다 더욱 어려웠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혹은, 시기심을 내려놓고, 행복의 관점을 바꾸는 등의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이미 세상이 성장한 배경을 몸소 체험한 우리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을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상대방의 승리에 우리가 웃을 수 없고 행복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존재는 항상 본질에 앞선다. 부시맨에게 다 마신 콜라의 유리병을 준다면, 절구, 물병 등으로 사용할 것이다.
인간은 본래 존재함에 있어서 정해진 목적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지게 된다. 그 이후 큰 틀에서는 각 국가와 종교, 성별, 세부적으로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성씨, 그리고 나를 잉태한 부모님의 부의 정도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만들어 간다. 센트럴 파크가 보이는 맨해튼에서 태어난 남성, 부모님은 명문대학교를 나온 예시와 아프가니스탄의 빈민촌에서 태어난 남성과는 아주 드라마틱하게 큰 차이를 보이는 본질이 나타날 것이다. 정답은 없지만 분명 다르다.
본질이란, 칼의 경우 물건을 자르고, 콜라병 같은 경우는 내용물을 담는 것처럼, A가 A다움을 나타내는 특성을 의미한다.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이전에는 본질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부터 정해져 있다고 여겨졌지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먼저 세상에 나온 후, 살아가며 형성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곧, 본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과물로 정의된다는 의미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그냥 다른 사람도 아닌, 나의 경쟁자의 승리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어렵다. 국가 간 문화의 우열, 경쟁업체 간 기술적인 우열, 개인 간 능력의 우열에 따라 우리는 때때로 우리와 관계없는 것에도 이기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고, 경쟁적 성향에 지배되곤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쟁적 성향과 호전성이 나는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는 역량의 성장과 행복감은 음의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나의 패배에도 스스로 위로를 하며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수동적 행복감이나, 타인의 승리에도 행복감을 느끼는 능동적 행복감 두 가지 모두 우리는 낮은 성장 동력을 갖게 된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양시론과 양비론은 환영받지 못한다. 우리의 인간은 꼭 내가 옳은 의견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딱 중간인 입장을 고수하고 싶다. 기정학(技政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제는 지정학과 같이 지리적 조건이 아닌, 기술이 새로운 권력의 축이며, 전략적 무기다. 반대로 또, 우리는 역사적으로 30세 이하의 청년들과 대부분의 나이대에서 최저의 행복도를 갖고 있는 세대이고, 이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가파르게 내려갈 수도 있다.
결국 본질은, 내가 '행복'보다 '성장'을 얼마나 더 중시(outweight)하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우리는 경쟁과 비교의 흐름 속에서도, 철저히 ‘나’만의 본질을 구분하고, 그에 따라 단계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남이 이기든 지든 중요치 않다. 문제는, '너는 도대체 무엇에 지고 있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