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기] 9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도시로

로스 아르코스 ~ 로그로뇨

by 강라곰

컨디션이 좋지 않기도 하고, 빨리 도시에 도착해서 쉬고 싶은 마음에 오늘은 버스로 로그로뇨까지 가기로 했다. 11시에 버스가 도착하니까 체크아웃 시간인 8시까지 최대한 알베르게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다들 곤히 자는 새벽, 조용히 2층 침대에서 내려와 식당에서 비상식량으로 구비해 둔 바나나를 꺼내 먹었다. 너무 추워서 8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을 배웅했다.

동태가 되기 전에 서둘러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어제 점심을 먹었던 곳이 일찍 문을 열었길래 그곳으로 향했다. 식당과 바를 함께 겸하는 곳이라 바를 운영하기 위해 열어둔 모양이었다. 오래 머물러야 해서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콘센트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아 일단 먼저 아메리카노와 크루아상을 시켰다. 스페인에서 시키는 아메리카노는 한국에서 파는 아메리카노의 톨 사이즈도 안 되는 아주 적은 양에 커피 맛도 진하다. 좀 더 연하고 시원하게 마시고 싶으면 얼음컵을 요구하면 된다. 콘센트에 정신이 팔려 버린 난 깜빡하고 얼음컵을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직원들이 분주해 보이기도 하고 아직 목도 칼칼해서 얼음컵은 포기하기로 했다. 콘센트는 결국 찾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줄어드는 핸드폰 배터리 때문에 초조해졌다. 핸드폰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대비해 집에서 손바닥 크기만 한 작은 책을 들고 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3시간 동안 멍하니 있기엔 심심해서 슬쩍슬쩍 핸드폰으로 e북을 봤더니 배터리가 쭉쭉 닳았다. 보조배터리는 충전이 됐다 안 됐다 해서 아예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바닥을 드러내는 배터리에 동네를 둘러보며 사진이나 찍어야겠다 하고 밖으로 나왔다. 카페 문을 열자마자 난 이 선택을 후회했다. 칼바람이 내 얼굴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버스 도착 시간은 아직 한 시간 남짓 남았다. 사진이고 뭐고 너무나 추워서 어제 걸어왔던 길을 뛰듯이 걸어 다니며 시간을 때웠다.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오니 순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길래 말을 걸었다. 그들도 여기서 로그로뇨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덜덜 떨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목 끝까지 지퍼를 올려도 바람이 점퍼 속으로 계속 들어왔다. 버스는 제시간보다 10분 정도 지나서 도착했다.

로그로뇨 가는 길은 여전히 흐렸고, 핸드폰 배터리는 10퍼센트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성당으로 좌표를 찍고 경보를 했다. 식당 ‘우동’이 오후 1시 오픈이라 시간이 많이 남아 성당에서 쎄요를 찍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착한 로그로뇨 성당에는 쎄요가 없었다. 난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픈 시간 20분을 남기고 ‘우동’ 앞에 도착했다. 비도 내리기 시작해 맞은편 건물 안에 들어가서 식당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2시가 지나자 식당 직원이 밖으로 나와 오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다가 직원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받은 자리에는 벽에 콘센트가 있어 다행히 핸드폰을 살릴 수 있었다. 따뜻한 국물이 땡겨서 나베야끼 우동과 고기만두를 시켰다. 먼저 나온 만두는 냉동만두를 덜 해동했는지 고기소가 얼어있어 헛웃음이 났다. 다음으로 나온 우동은 한국에서 먹던 우동과 크게 차이가 없어 언 몸을 녹이며 맛있게 먹었다.


핸드폰 충전과 에너지 충전을 끝내고 여유롭게 배낭 배달을 맡겨 둔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공립 알베르게 앞에는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순례자들이 서있었는데, 그들은 내게 오픈 시간이 3시라며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고 말했다.

일단 오늘 잠을 잘 숙소 체크인을 먼저 했다. 로그로뇨는 관광도시인 듯했다. 체크인을 하기 위해 내 뒤로 줄을 선 스페인 관광객들이 나에게 순례자냐고 물어보며 신기해했다.

숙소에서 좀 쉬다가 공립 알베르게로 배낭을 찾으러 갔다. 도시를 둘러볼 생각이었지만 씻고 나니 체력이 바닥나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 저녁에는 한국인 순례자들과 타파스 투어를 했는데 유명하다는 양송이 타파스부터 맛을 봤다. 불꽃축제 시즌 푸드트럭처럼 가게 앞은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철판에는 끊임없이 양송이가 구워지고 있었다. 올리브유와 마늘에 푹 절여진 양송이 구이가 나왔는데, 한입 베어 물자 양송이 즙이 터지면서 눅진해진 올리브유와 함께 조화로운 맛을 이루었다. 장사가 잘되는 가게라 방금 구운 따끈한 타파스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그 후 들어간 다른 타파스 가게는 미리 요리해 놓은 음식을 데워주거나 그냥 접시에 담아 주어 양송이 타파스와 같은 감동을 느끼기 어려웠다. 많은 인파와 맥주로 인한 취기로 인해 우리는 일찍 파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정신없고 음식도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스페인 음주 문화를 체험한 것에 의의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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