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로뇨 ~ 나헤라
한국인 순례자와 함께 나헤라로 가기로 해서 7시쯤 숙소를 나왔다. 오늘의 목표는 나헤라에 있는 중식당에 가는 것인데 브레이크 타임을 피해 4시 반 전까지 도착해야 한다. 항상 샐러드와 고기만 나오는 단조로운 순례자 메뉴에서 벗어나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발 상태도 나쁘지 않았고, 처음으로 30킬로를 걸어야 해서 원래 페이스 보다 조금 더 빨리 걸었다. 걷다 보니 종아리 쪽 부근에 근육이 뭉치는 느낌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바레타라는 아기자기한 마을에서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벤토사라는 마을에서 patatas bravas라는 매콤한 감자요리와 레몬 맥주를 먹을 때까지만 해도 행복했다. 이제 두 시간만 더 걸으면 도착이구나, 30킬로 걷는 거 할만하네 하며 자만감에 넘치고 있었다.
위기는 언덕을 오르고 나서부터 시작됐다. 발이 빠른 동행자는 앞서 나아가고 있었고, 난 어느 순간부터 지도 따위 보지 않고 동행자의 뒷모습만 보고 걸었다. 먼저 이상함을 인지한 동행자는 뒤돌아 와 내게 까미노 표시인 노란색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고, 난 그제야 까미노 닌자 앱을 열었다. 우리는 앱에 표시된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까미노 길에서 벗어났음을 인지한 후, 이를 동행자에게 알리고 다시 되돌아가자고 말했지만 동행자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 보였다. 막상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니 나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 계속 앞을 향해 걷기로 했다. 하지만 걸어갈수록 점점 더 목적지와 멀어지는 것 같아 불안해졌다. 심지어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은 인적 드문 언덕 위 포도밭이었다. 길은 우리를 수풀로 인도했다. 뭔가 잘못됐음을 인지한 우리는 그제야 멈춰 섰고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시 되돌아가기엔 너무나 먼 거리를 걸어왔기에, 일단 언덕을 벗어나 나헤라를 향해 가자는 결론을 내리고 내려갈 길을 찾아다녔다. 저 멀리 샛길이 보여 가려는데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수풀로 가려진 철창 너머로 양 떼와 우리를 향해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개가 보였다. 순간 까미노 길에서 들개에게 물렸다는 블로그 글이 떠올라 다리가 얼어붙었다. 철창이 있다고 해도 혹시나 개 한 마리가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철창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서 샛길을 향해 나아갔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 아니다 보니 허벅지까지 자란 풀과 가시 돋친 식물 때문에 바지가 긁혔다. 반바지였다면 다리가 생채기로 가득했을 것이다.
언덕을 내려오는 건 성공했지만 핸드폰 배터리가 아슬아슬하게 10퍼센트 대가 되었다. 까미노 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일단 다시 까미노 길을 찾아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실성을 한 나머지 10분 정도를 크게 웃었다.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나니 다시 일어날 힘이 생겼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까미노 길은 어이없게도 길을 잃었음을 인지한 언덕 꼭대기에서 우리가 가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걸어가면 나오는 길이었다. 까미노 길에 가까워지자 집 한 채가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근처 벤치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먀!” 하는 소리와 함께 아기 고양이가 동행자와 나 사이를 비집고 머리를 쏙 내밀었다. 그러고는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는데 그 모습에 긴장했던 몸이 풀리고 피로가 가셨다.
천사와도 같던 고양이 덕분에 힘이 난 우리는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노란색 화살표에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마을까지 2시간은 더 걸어야 했다. 이미 지친 사람에게는 상당히 긴 거리였다.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마을과 점점 굳어가는 다리, 안면을 강타하는 비바람에 우리는 다시 한번 지옥을 맛봤다. 비는 금방 그쳤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철창을 빠져온 개가 우리를 향해 짖는 바람에 전속력으로 뛰어야 했다. 이때의 대미지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등산 스틱을 지팡이 삼아 걸어야 했다. 겨우 만난 마을 사람으로부터 나헤라까지 30분이 남았다는 말을 듣고 또 좌절했다. 바람은 멈출 줄을 모르고 날씨도 점점 추워졌다.
다리를 한계에 한계까지 사용해서 나헤라에 도착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아 근처에 있는 바에서 잠깐 휴식을 청했다. 핸드폰을 충전하고, 설탕을 잔뜩 넣은 달달한 카페 콘 레체로 추위를 녹였다. 우리는 이 어이없는 연속적인 재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여전히 실성해 있는 상태였다. 지도로 확인해 본 결과 우리의 짐이 배달되어 있는 공립 알베르게까지 15분은 더 걸어가야 했다. 난 오렌지주스 한 잔을 주문해 당분을 더 충전시켰다. 쉬는 동안 다리가 더 굳어 반발자국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오늘 일정 중 이 15분이 가장 힘들었다.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데 공립 알베르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새 해가 지는 바람에 밤눈이 어두워져 앞서가는 동행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겨우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가자 자원봉사자들이 고생했다며 환영의 박수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도 그럴게 오후 6시가 다 되어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동행자는 길을 잘못 들은걸 자신의 탓을 하며 중식당에서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나야말로 앞서 가는 사람에게만 의지해 걸어간 잘못이 있었다. 오늘 일은 서로의 탓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움직이지 않는 다리 때문에 짜증이 좀 났는데 그렇게 먹고 싶었던 중식당을 가지 않으면 억울할 것 같아 발을 질질 끌고 중식당으로 향했다. 맛을 떠나 오랜만에 먹는 밥이라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럴수록 몸 상태가 좋은 날에 왔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다리를 질질 끌며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고생한 서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철문에 공이 부딪히는 소리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르기 시작했다. 피곤하기도 했고, 알베르게에 있는 사람들 누구도 이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아 그냥 다시 잠이 들도록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