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기] 12화. 짜증을 내봤자 바람은 멈추지 않아

산토 도밍고 데 라칼사다 ~ 벨로라도

by 강라곰


1인실에서 푹 자고 일어나니 30km 넘게 걸어 고생한 발이 회복되었다. 오전 7시에 벨로라도로 가는 순례길에 올랐다. 길목부터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바람은 멈추지 않고 내 얼굴을 강타했다. 뒤 돌아보니 해가 뜨기 시작해 내가 떠나온 마을, 산토 도밍고를 환하게 비추었다. 여기와는 다르게 따뜻해 보여서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졌다.

바람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비까지 내렸다. 우비를 꺼내 입다가 바람에 우비가 내 얼굴을 휘감고 말았는데 바람이 차단되어 추위가 가셨다. 그때부터 난 얼굴에 우비를 휘감고 다녔다. 감기 끝물인지 어제부터 콧물이 자꾸 흘러내렸는데 찬바람을 맞으니 증상이 더 심해졌다. 다음 마을이 나올 때마다 코를 한 바가지 풀었던 것 같다. 계속 바람과 함께 걷다 보니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는데 방금까지 짜증을 부렸던 내가 생각나 머쓱해졌다. 조금만 참으면 익숙해질 것을 왜 항상 짜증부터 냈을까. 짜증을 내봤자 바람은 멈추지 않는데. 그래도 춥기는 더럽게도 추워서 두 번이나 바에 들려 몸을 녹였다.

자주 쉬면서 걸었음에도 벨로라도에 도착해서 마트를 찾아다닐 때까지 발이 너무 아팠다. 발바닥에 물집이 또 생긴 모양이다. 마트에서 생필품을 사고, 오늘의 메뉴를 먹기 위해 미리 봐둔 레스토랑으로 갔다. 전식으로 나온 까르보나라는 실망스러웠고 본식은 소시지, 닭, 소고기, 돼지고기가 모둠으로 있는 구이였는데 소고기가 의외로 맛이 좋아 안심으로 시킬걸 후회되었다.

오늘도 20유로가 넘는 숙소를 예약했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는데 내 찬 몸을 녹여주지는 못하였다. 담요와 침낭을 머리끝까지 덮어도 몸이 덜덜 떨렸다. 하는 수없이 사장님에게 3층이 너무 춥다고 말하니 그제야 분주하게 조치를 취해주셨다.

다시 이불속에 들어와 떨고 있었는데 배낭동키를 하는 업체로부터 문자가 왔다. 내일 동키를 보낼 거냐는 문자였다. 미리 봐둔 아헤스의 알베르게로 짐을 보낼 거라고 하자 내일 아헤스에는 문을 여는 알베르게가 없어 다음 마을로 가야 한다는 답장이 왔다. 당황스러웠다. 다음 마을까지는 30km 정도. 예정에 없던 장거리를 내일 걸어야 할 수도 있다. 일단은 아헤스 다음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에 내일 침대가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답장이 없거나 문을 열지 않을 거라는 답장만 받았다. 점점 초조해졌다. 다다음 마을인 부르고스로 넘어가야 하나? 그럼 또 택시를 타고?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나왔다. 한국에서 개고생 하며 번 돈을 이렇게 허무하게 쓴다고? 계획에도 없는 택시를 타느라? 택시 타려고 순례길 왔냐? 그러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기 전에 난 금방 현실에 순응했다. 그래, 뭐 어쩌겠어. 숙소가 문을 안 여는 걸. 부르고스에서 초밥 뷔페나 맛있게 먹고 다시 열심히 걷자. 이러고 다시 택시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문자가 왔다.


‘침대 1개 남는 게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라시아스! 난 바로 침대를 예약하고 동키까지 일사불란하게 예약을 끝냈다. 이제 내일 30km 걸을 걱정이나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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