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기] 13화. 여기와서 처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벨로라도 ~ 아타푸에르카

by 강라곰

천천히 30킬로를 걷고 싶은 마음에 해가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시간에 숙소를 나왔다. 어릴 때 이후로 오랜만에 어둠에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인적 드문 시골길이라 조부모님이 살던 동네가 생각나기도 했다. 시골의 밤은 빌딩이나 아파트의 불빛도, 가로등도 얼마 없어 아주 캄캄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좀처럼 시각을 사용할 수 없어 청각이 발달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발을 내딛는 소리와 턱턱 땅을 짚는 등산스틱 외의 다른 소리가 들릴 때면 움찔거리게 된다. 다행히 새들이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나 다른 순례자들이 걸어오는 소리였고, 곧이어 해가 떠서 안전하게 순례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일찍 일어나 천천히 걸어간 덕분에 30킬로 넘게 걸어도 발에 무리가 없었다. 중간에 들린 마을에서 먹은 또르띠야는 지난날의 그 사건을 잊게 해 줄 만큼 맛있었다. 날씨도 따뜻해서 힘든 구간을 걸어가는 것도 잊게 만들었다. 아타푸에르카 마을에 도착해서 건강한 맛의 베이컨 버섯 피자를 먹고 후식 아이스크림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알베르게 마당을 돌아다니는 고양이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때웠다. 순례길 위 고양이들은 대부분 인간친화적이었다. 사람 많은 알베르게에 거침없이 들어가고 그들의 손길을 받으며 배를 뒤집어 깐다. 한국 길고양이들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다. 순례길 위 고양이들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자랐다는 게 느껴져서 한국 길고양이들에게 미안함과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걱정스러웠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아주 평화로운 하루를 보냈다. 택시 타거나 포기하지 않고 걷기로 결심하길 잘했는 생각이 든다. 순례길 와서 처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내일도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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