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라 ~ 로스 아르코스
어제 감기 기운이 느껴져 테라플루를 먹고 잠들었는데 한쪽 코가 꽉 막힌 상태로 일어났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도 아팠다. 내일 큰 도시인 로그로뇨에 가서 우동과 타파스를 맥주와 함께 먹어야 하는데 몸 상태가 이래서야 음식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오늘은 혼자 로스 아르코스까지 걷는 날이다. 가는 길에 조개 목걸이를 파는 대장장이 가게와 공짜로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수도원이 있다고 한다. 덥기만 했던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아침부터 차가운 강풍이 불었다. 강한 바람에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바닥만 보며 걸었다. 대장장이 가게는 지나친 모양이었다. 지도를 열어 확인할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와인 수도꼭지가 있는 수도원에는 잠깐 들러서 사진만 찍고 바로 나왔다. 멈출 줄 모르는 바람 때문에 감기가 악화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걷는 구간도 어제처럼 극심한 오르막이나 내리막 없이 평탄하다는 것이다. 그저 바람이 많이 불어 풍경을 감상하거나 사진 찍을 여유가 없었다. 땅만 쳐다보며 빠르게 걸었다. 낮은 언덕을 오르는 도중 절벽 끝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순례자가 보였다. 여유로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이깟 바람에 넋이 나가있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난 왜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쫓기듯이 걷고 있을까. 걷는 속도를 조금 줄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이 순간을 즐기기까지는 좀 어려웠다.
정오가 되어가자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불었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따스한 바람이었다. 가끔은 뒤에서 지친 나를 밀어주기도 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었던 굽어진 길을 지나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다. 에스텔라보다 훨씬 작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지도상으로는 마켓이 있다고 나와있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다행히 물을 파는 자판기가 있어 내일 마실 물까지 넉넉하게 두 개를 뽑았다. 자판기에서 열 걸음 정도 걷자 미리 예약해 둔 할머니 간판 알베르게가 보였다. 후기가 좋아서 예약했는데 알베르게 안은 생각보다 좁았고, 두 개로 나눠진 방에서 여러 명이 묵다 보니 답답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니 바닥에는 일찍 도착한 순례자들의 가방과 옷가지들로 가득했다. 약간의 빈 공간을 찾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짐을 풀고 있었는데 창 너머로 익숙한 옷차림을 한 순례자가 보였다. 한국인 일행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다음 마을인 토레스까지 간다고 하여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14유로에 디저트까지 코스로 나오는 메뉴를 먹었는데 전식은 믹스 샐러드를 시켰다. 참치와 토마토, 채소 등이 들어있어 낯설지 않아 맛있게 먹었다. 본식은 토마토와 고추가 들어간 돼지고기 조림을 시켰는데 살짝 매콤한 장조림 맛이었다. 사이드로 나온 감자튀김을 가장 맛있게 먹었는데 너무나 담백하고 고소했다. 조리 방식이 특별하다기보다는 감자 자체가 맛있었던 것 같다. 후식으로는 이 지역에서 유명한 쌀푸딩을 시켰는데 요즘 쇼츠에서 유행하는 망고사고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푹 절여진 쌀 알갱이가 부드럽게 씹혔고, 맛은 달달한 연유 맛이었다. 든든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룸메이트들이 밤새도록 방을 들락날락하고 큰 소리로 잡담하는 바람에 잠이 깊게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