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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일기] 7화. 힘든 길을 걷게 해주는 레몬맥주

푸엔타 라 레이나 ~ 에스텔라

by 강라곰


아직 사방이 어두운 새벽. 어제 일찍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쓰지 못한 일기를 식당에서 써 내려갔다. 씻고 동키를 보낼 준비를 끝내니 어느덧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7시가 되자 일행과 나는 어제저녁을 먹으러 갔던 카페를 다시 방문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순례자들과 마을 주민들로 북적였다. 마을주민들은 아침에 곁들여 먹을 빵을 사는 듯했다. 새삼 그들의 주식이 빵이라는 걸 깨닫는다. 난 간단하게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오늘 걷는 동안 쓸 에너지를 충전했다.

에스텔라까지 가는 구간은 초반 오르막을 제외하고는 평탄한 길이라서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11시쯤 되자 더워지기 시작해 겉옷 안쪽에 달린 플리스를 뗐다. 땀을 흘리다 보니 평소보다 더 갈증이 나서 물을 계속 꺼내 마셨다. 물을 거의 다 비워갈 때쯤 바를 발견했다. 바 주인에게 술만 시켜도 되는지 물어본 후 스페인에서 꼭 먹어야 한다는 레몬 맥주(clara cervenza con limon)를 시켰다. 제조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레몬주스에 생맥주를 섞은 아주 간단한 레시피였다. 한국인 순례자와 나는 동시에 한입 마시고는 맛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의 새콤함이 맥주의 쿰쿰함을 잡아줘서 막힘없이 식도로 넘어갔다. 찬 걸 급하게 먹으면 배탈이 나는 내 체질을 잊을 만큼 맛있어서 금세 반을 비워냈다.

알콜의 힘을 빌려 한 시간 정도 더 걸은 후 목적지인 에스텔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처음으로 알베르게가 아닌 호스텔에서 묵었다. 이 호스텔에서 한국 라면을 판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팜플로나에서 라면을 먹었지만, 또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민트색 벽으로 칠해진 아기자기한 호스텔 문을 여니 직원이 우리를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로비 선반에 신라면이 있음을 확인하고 호스텔 직원의 안내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침실과 화장실, 샤워실 모두 호텔 못지않게 깔끔했다. 우리는 짐을 대충 풀어놓고 슈퍼에서 장을 보고 저녁을 차렸다. 라면을 끓이고 곁들여 먹을 만두를 구웠다. 점점 라면에 대한 감동이 덜해지지만 그래도 든든한 한 끼를 먹어서 행복했다. 저녁을 먹은 후엔 비상용 컵라면을 몇 개 더 구매했다.


2층 침실로 올라오니 7유로를 주고 맡긴 빨래가 침실 옆에 배달되어 있었다. 레몬 향기가 가득한 빨랫감은 갓 건조기에서 꺼낸 듯 뜨끈뜨끈했고, 네모 반듯하게 접혀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방 안에 가득 퍼진 레몬 향기를 맡으며 내일 묵을 숙소와 동키를 예약했다. 씻고 난 후에는 발바닥 상태를 확인했다. 물집을 터뜨리고 연고를 바르다 보니 어느새 노곤노곤해져 잠이 오기 시작했다. 이렇듯 순례길을 걷고 난 오후 시간에는 은근 할 일이 많아 순례길 동안 읽으려고 한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진도가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오늘은 호스텔 측이 대신 빨래를 해줘서 책을 읽을 시간이 생겼다. 졸음을 이기고자 공용공간으로 내려가 <순례자>를 읽었다. 책에는 낯설지 않는 지명이 나왔다. 과연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까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침실로 돌아와 책을 마저 읽으려고 했지만 눈이 스르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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