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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일기] 5화. 고대하던 순례길 위 첫 라면

by 강라곰


일어나자마자 봉추찜닭, 유가네 닭갈비, 짚신 매운 갈비 이런 매콤하고 자극적인 음식들이 미친 듯이 먹고 싶어졌다. 블로그나 유튜브를 먹방을 찾아보며 고이는 침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현지 음식은 커피와 빠에야 말고는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 느글거리는 속을 잡아줄 음식은 라면이나 김치뿐이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빵에 환장했으면서 정작 빵의 고장 유럽에 와서는 쳐다보기도 싫어지다니.

오늘은 팜플로나에서 연박을 하는 날이다. 씻기 위해 화장실로 가는 짧은 거리에도 어제 물집 터진 부분 때문에 쓰라렸다. 공립 알베르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 한국인들과 난 헤밍웨이 카페로 유명한 카페 이루냐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카페 콘 파냐를 시켰는데 물 탄 라떼 맛이 났다. 진하고 고소한 맛을 기대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나머지 한국인들은 추로스와 뺑오쇼콜라를 시켰는데 택시 구토 사건으로 인해 초콜릿과는 멀어지고 싶어 손을 대지 않았다.


12시가 되기 전에 미리 공립 알베르게 앞에서 대기해서 첫 번째로 입장했다. 어제부터 기다려온 라면을 드디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짐을 풀 때부터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한국인들과 아시안 마트에서 장을 본 후 서둘러 요리를 시작했다. 어제오늘 한국인들에게서 얻어먹은 게 많아 내가 끓이고 싶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선수를 뺏겨버렸다. 대신 플레이팅을 하며 라면을 기다렸다. 곧 신라면과 불닭게티, 샐러드, 만두로 이루어진 멋진 한상이 차려졌다. 불닭게티가 불기 전에 얼른 한입 먹었는데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입에 매운 기가 많이 맴돌았다. 라면 국물을 마시자 그동안 먹었던 느끼함에 내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전날 먹은 오렌지만큼의 큰 감동은 없었다. 편하게 휴식을 취한 후 먹은 라면이라 그런 걸까. 어제 고행을 하고 온 뒤 먹었으면 좀 더 맛있게 먹었을 것 같다.


점심을 먹은 뒤엔 할 일이 많았다. 먼저 숙소 근처에 있던 팜플로나 대성당을 구경했다. 아파트 4층 정도로 층고가 매우 높았고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곳곳에 있어 화려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종교적인 예술작품이 곳곳에 가득했는데 금칠이 된 조각상이 많이 보였다. 성당 안을 들어와 본 건 처음이라 꽤 오랜 시간을 성당 안에서 보냈다.

대성당의 웅장함을 뒤로하고 모자와 우산, 발이 편한 운동화를 사기 위해 데카트론으로 향했다. 그동안 신었던 등산화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 발에 무리가 갔었다. 방수가 되는 마음에 드는 신발을 발견했는데 안타깝게도 맞는 사이즈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같은 브랜드의 세일 중인 신발을 샀다.

장보기를 끝내고 돌아오니 한국인들이 티타임을 가지고 있길래 합류했다. 어쩌다 보니 같은 공간에 있는 콜롬비아에서 온 친구에게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그는 스무 살이고 돈을 벌러 스페인에서 왔다고 했다. 궁금증이 생긴 우리는 끝없는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고 콜롬비아는 치안이 좋지 않다는 것과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이 커피와 술을 접하고 몇몇은 마약에 손을 대고 총기까지 소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직접 면전에서 들으니 현실감이 느껴져 약간 소름 돋았다. 내가 만약 콜롬비아에서 태어났다면 그와 같이 돈을 벌러 스페인에 오게 됐을까. 치안이 좋은 편에 속하는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들은 한국식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이민을 간다. 한국의 경쟁 사회가 지긋지긋하다고들 말한다. 나도 어떻게 보면 경쟁 사회에 속해 있다가 자유를 찾아 도피한 사람이다. 자국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떠난 도피성 여행. 사서 고생하는 여행, 고행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놀고먹는 여행은 양심에 찔려 스스로 고행이라고 세뇌하는 게 아닐까.

저녁은 간단하게 라면에 맥주를 먹기로 했다. 그 콜롬비아 친구도 불러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는 처음에 우리에게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고 했지만 신라면을 맛본 후엔 맵다며 잘 먹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한국인 두 명은 맵 부심에 호탕하게 웃었다. 저녁을 먹고 나머지 한국인들이 있는 카페 이루냐로 향했다. 그들은 양고기를 먹고 있었는데 오늘 먹은 라면보다 훨씬 만족스럽다며 극찬했다. 어떤 맛일지 궁금했는데 고기는 별로 땡기지 않았다. 대신 샹그리아를 시켜 조금 홀짝거렸는데 기성품 맛이 났다.

숙소로 돌아와 발바닥 상태를 확인해 보니 어제보다 심각해져 있었다. 후시딘을 듬뿍 바르고 내일 걸을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기도하며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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