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가방에 달린 가리비가 풀어지지 않게 꽉 조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내가 머무는 침대 아래층에는 다리를 다쳐 연박하는 엄마 나잇대의 순례자가 곤히 자고 있었다. 조용히 계단을 내려와 세면도구를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비성수기 순례길에서 충격적인 풀 베드를 겪은 우리는 이른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 재빠르게 씻고 동키를 하기로 한 배낭을 1유로나 하는 사물함에 넣은 후 미리 1층으로 내려갔는데 어느샌가 준비를 다 끝낸 일행들이 몰려와있었다. 함께 길을 떠나려던 순간, 배낭에 등산 스틱을 두고 왔다는 걸 깨닫고 다시 1유로를 내고 배낭을 사물함에 넣어야 했다. 어리바리짓을 하고 돌아오니 나머지 일행들은 떠나 있었고 한 분이 나를 기다려주고 계셨다. 어제부터 내가 왜 이럴까 자괴감에 빠져 아침부터 기운이 나지 않았다.
팜플로나 벗어나자 아침에 있던 일을 잊을 정도로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넓은 평야와 사다리꼴 모양의 언덕. 그리고 그 언덕으로 이어져 있는 흙길을 산책하고 있는 강아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용서의 언덕까지 가는 오르막은 완만하기도 하였지만 걷는 도중 보이는 풍경 덕분에 더욱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오르는 도중 뉴질랜드 친구를 만났는데 동행한 한국인이 영어를 잘해서 그녀와 어렵지 않게 소통을 했다. 그 친구는 나에게도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서로 상대방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대화가 계속 끊겼다. 솔직히 이 여행의 목적은 외국인 친구 사귀기가 아니었므로 영어를 열심히 배워가지 않았는데 이럴 때는 좀 후회가 된다. 나 혼자 걸었으면 그저 “부엔까미노~” 하고 헤어졌을 텐데 영어를 잘하는 동행이 있으니 뉴질랜드 친구는 어느새 같이 걷는 멤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용서의 언덕에 다다랐다. 용서의 언덕에는 순례자 행렬처럼 보이는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내리막길부터가 지옥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 언덕 위에서 사진을 찍고 간식을 먹으며 짧은 행복감을 맛봤다.
내리막길은 주먹만 한 돌이 사방에 깔려있었다. 여기서 잘못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발목을 삐끗하면 앞으로 30일간의 일정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게 된다. 난 신중하고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며 천천히 내려갔다. 터벅터벅 잘 걷는 일행들은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어차피 둘이 영어로 대화하고 있어 소통도 잘되지 않으니 천천히 내려가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앞서 간 둘이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난 고맙다는 뜻으로 싱긋 웃고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돌 길은 끝이 없었고, 큰 돌 길에서 벗어나자 자잘한 돌 길이 나왔다. 발바닥과 발목에 무리가 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몇 시간을 돌길에서 헤매다가 평지가 보이는 순간 “살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다시 평지에서 셋이 나란히 걷기 시작하니 뉴질랜드 친구는 나에게 또 질문을 해왔다. 왜 순례길을 걷고 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물어봤다. 솔직히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끼리는, 특히 일회용 만남에서는 취미나 기호 같은 가벼운 주제로만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나는 짧게 대답했고,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무슨 일을 해왔는지 걸어오는 내내 이야기했다. 본인과 본인의 인생에 대해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난 그녀와 가벼운 얘기만 하고 싶다고 했지만, 실은 내 삶에 대해 자신감이 없어서 이야기하기를 꺼렸을지도 모른다.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가는 여정은 기가 빨리고 점점 우울해져 빨리 숙소에 가서 눕고 싶었다.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억지웃음과 억지 리액션을 버무렸다. 내일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홀로 걷고 싶어졌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편하게 쉴 수 있을만한 다음 지역 숙소를 예약했다. 침대에서 조금 쉬고 나서 간단히 음식을 먹을만한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는 생각보다 여러 종류의 빵이 있었다. 난 허기를 달래줄 햄 치즈 크루아상과 카페 콘 레체, 오렌지주스를 시켰다. 크루아상은 데워주지 않아 눅눅해서 아쉬웠지만 햄 치즈가 들어가서 짭짤 고소하고 맛있었다. 현지인들은 다들 카페 콘 레체에 설탕을 넣어먹길래 반 정도 넣어봤는데 우유 풍미가 더 살아났다. 오렌지주스는 주문이 들어오면 직접 착즙해 주고 있어 신선하게 먹을 수 있었다. 이 식사는 한 달간의 순례길 중에서 베스트에 들어간다. 별거 아닌 레시피지만, 심지어 빵이 눅눅했지만 햄이랑 치즈 자체가 맛있어서 그런지 최고의 크루아상 샌드위치였다. 지금도 이 맛이 생각나 침이 고인다. 꽤나 우울한 날이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기분이 금방 풀렸다. 자주 우울해하지만 우울증까지는 진단받은 적이 없는 거 보면 내가 이런 단순한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